[르포] 사라져가는 친일 자취…‘10만평’ 집터엔 돌담·연못 흔적만[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잊힌 친일 문화 잔재①]
2023-10-21 13:52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국내편〉 [3] 친일 문화 잔재-경기도편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위치한 친일행위자 송병준의 별저 터. 해당 지역에는 송병준의 집이 들어선 것을 짐작할 만한 돌담의 흔적이 남아있다. 김영철 기자

[헤럴드경제(안성·용인)=김영철 기자] “민족의 자랑스러운 유산만이 역사적 기념물이 아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증거물이다.”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헤럴드경제는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경기 다크투어’ 프로그램에 지난 8월 두 차례에 거쳐 참여했다. 일제 치하의 아픔과 슬픔의 역사적 장소를 돌아보는 일정으로 구성된 이 지원 사업은 일반 시민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친일논란이 있는 인물들이 세운 비석과 별저 등 알려지지 않은 흔적을 재조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본지가 경기 다크투어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위치한 송병준의 별저. 송병준은 조선시대 고종의 퇴위와 한일 병합, 일진회 조직, 중추원 고문 등 일제의 국내 침탈과 매국 행위에 앞장 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0년부터 이듬해까지 양지 현감을 역임한 그는 1910년 한일병합에 앞장 선 공로로 일본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고, 10년 뒤인 1920년엔 백작으로 승작됐다. 송병준의 친일 행적은 대를 잇는다. 그의 아들 송종헌은 아버지로부터 백작 작위를 물려받고 일진회 평의원 활동과 조선소작인상조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1990년대 당시 친일 인사 송병준 별저 모습. 2000년대 이후 해당 별저는 헐리면서 온누리세계센터가 들어섰다. [용인문화원 제공]

송병준이 지난 1905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293번지에 지은 별저는 10만평의 부지를 자랑한다. 본채만 99칸의로 규모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수십 명의 일본 순사들의 그의 집을 경호했을 정도다. 이런 까닭에 용인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송병준의 별저를 주요 공격지로 삼았다고 했다. 언제든 의병들이 자신의 별저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위험에 그의 별저에는 수 십 명의 일본 순사가 배치돼 경호를 맡았다고 했다.

이런 그의 별저는 2000년대 초반 철거돼 온누리세계센터가 자리 잡았다. 이로 인해 송병준 별저를 짐작할 만한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온누리세계센터에서 100m 방면에 위치한 돌담과 연못의 흔적이 전부다. 여타 역사 기록물들과는 달리 친일 인사가 머문 별저의 흔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먼저 온누리세계센터에서 50m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송병준의 별저를 둘러싼 돌담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10만평의 부지와 99칸의 규모로 지어진 별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남아있는 돌담은 10m가 채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수풀로 뒤덮여 있었다. 송병준의 별저에 있던 각 방의 자재들은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건축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0만평 규모의 친일파 터, 수풀로 뒤덮인 돌담·연못만…안내판은 전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293번지 송병준 별저 앞 연못으로 추정되는 ‘영화지’ 비석. 현재 온누리세계센터가 자리잡은 이 부지엔 송병준의 별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별도의 안내판이 없다. 연못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화지 비석 뒤에도 별도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수풀로 채워져 있었다. 김영철 기자


1920년대 친일 인사 송병준 별저 앞에 위치한 ‘영화지(映華池)’ 모습. [용인문화원 제공]

온누리세계센터 정문을 나서 도로를 따라가면 도로 옆에 세워진 작은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성인 남성 허리춤 정도 되는 높이의 한 비석에는 ‘영화지(映華池)’라고 적혀있다. 과거 송병준이 지인들과 함께 별저 앞에 조성된 연못 한 가운데서 연회를 즐기던 곳을 가리키는 비석이다.

용인문화원에 따르면 영화지는 약 991㎡ 규모로 크고 작은 두 개의 타원형 연못이 연결된 8자형 구조로, 표석 반대편에는 팔각정이 들어섰다. 큰 못 가운데 둥근 섬을 조성한 원도형 구조로 건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지 뒤편에는 연못으로 추정되는 터가 보인다. 이 곳 역시 돌담과 마찬가지로 수 십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과거 물이 채워졌던 곳으로 보이는 지점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큰 못 가운데 조성된 둥근 섬도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날 프로그램을 참가한 A씨는 “주최 측의 설명이 없었으면 영화지와 돌담 모두 그저 흔한 수풀 더미인줄 알았을 것”이라고 놀라워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 위치한 온누리세계센터 정문 앞 영화지 터. 송병준의 별저 터로 알려진 이곳엔 그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연못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해당 부지에 대한 별도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오늘날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터엔 수풀만 무성하게 자라 있다. 김영철 기자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한경국립대학교 정문에는 8m 높이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경대학교의 설립자로 알려진 박필병(1884~1949)의 동상이다. 안성 출신의 대부호이자 기업인 이 동상의 주인공으로 한경대의 전신인 안성농업학교의 설립자다. 박필병도 친일 논란의 인물이다.

박필병은 1939년 기부금 5만원을 바탕으로 한경국립대학교의 전신인 ‘안성공립농업학교’를 설립했다. 해당 대학은 이후 발전을 거듭해 1979년에 안성농업전문대학으로 승격되고 1993년엔 안성산업대학교로 개편됐다. 2012년에는 일반대학으로 전환하면서 한경대학교가 설립됐다. 지난해 4월엔 한경대학교와 한국복지대학교가 통합돼 오늘날 한경국립대학교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박필병은 사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5인 중 한 사람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을 근거로 발족됐다가 4년 뒤 활동을 종료한 기구다. 진보성향의 민관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박필병은 언급돼 있다. 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1920년대 면협의회원으로 시작해 1927년 경기도 도회의원을 역임했다. 1933년 경기도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1941년 9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는데, 이를 기념하는 축하회를 겸해 그의 동상을 안성농업학교에 세웠다. 현재의 동상은 안성농대 동창회에서 1980년 5월 박필병의 모습을 복원해 새로 세운 것이다. 박필병은 중일전쟁 당시 일제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와 비행기도 헌납할 정도로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전개했다. 실제로 그는 1937년에 2050원 상당의 고사기관청 1정 구입비를 안성경찰서에 헌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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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
헤럴드경제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은 역사적 논쟁 속에 사라지는 한국 근현대사 유적을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본 기획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기획 : 김빛나 기자

팀 구성원 : 김빛나·김영철·박지영·박혜원 기자

지원 :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 전체 시리즈〉

〈독일편〉

[1] 뉘른베르크편

[2] 베를린편

〈국내편〉

[1] 근현대사 유적지도

[2] 당신이 모르는 6·25

[3] 잊힌 친일 문화 잔재

[4] 누구의 것도 아닌, 적산

[5] 남영동과 32개의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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