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시대 ‘LP 열풍’
2023-11-03 11:27

팬데믹 지나며 팬덤 타고 급성장
다양성·취향 중시 MZ세대 주도
LP, 35년만에 CD보다 더 팔려



음원 스트리밍 시대에 LP 열풍이 일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1987년 이후 처음으로 LP 판매가 CD 판매를 넘어섰고, 국내에서는 팬데믹 동안 급성장한 LP 시장이 숨고르기에 들어가며 고정 소비층을 다지고 있다. 사진은 홍대 레코드숍 피터판. [마포문화재단 제공]


명실상부 ‘취향의 시대’다. 언제 어디서나 음원 차트 ‘톱100’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나만의 인생곡’을 소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취향을 찾다가 ‘LP 디깅(Digging·집중해 파고들다)’에 빠진 사람들. 201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시작된 ‘LP 트렌드’가 변곡점을 맞고 있다.

‘LP 트렌드’는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주류 팝 시장인 미국부터 한국까지 거대한 유행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관련기사 4면

미국레코드산업협회(RIAA)가 발간한 ‘2022 음악 산업 수익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LP 판매량(4100만 장)은 1987년 이후 처음으로 CD 판매량(3300만장)을 넘어섰다.

LP의 온라인 판매 뿐만 아니라 각종 레코드 행사를 찾는 방문객의 규모로도 이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레코드페어에 따르면, 지난 2011년 페어 시작 당시 2000명의 방문객이 현장을 찾았고, 2018년 접근성이 좋은 서울역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엔 역대 최다인 2만5000명이 다녀갔다.

서울레코드페어를 운영하는 김영혁 김밥레코즈 대표는 “2018년부터 현장에서 판매되는 음반이 남김없이 모조리 팔려나가기 시작했다”며 “현장에서 한정판 LP를 구하지 못하자 리셀러가 붙으며 온라인에 다시 거래되는 모습도 나타나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LP 시장은 2017년 이후 눈에 띄는 성장을 보였고, 코로나19 팬데믹 때 급격하게 규모를 확대했다. 전 세계 분위기도 비슷했다. 팝스타들은 공연 시장이 닫히며 투어를 할 수 없게 되자 LP 생산으로 새로운 수익 창출을 시작했다. ‘코로나 특수’가 불러온 ‘LP 붐’이었다.

팬데믹 시기의 레코드 시장은 복잡 미묘했다. 김 대표는 “2020년부터 1~2년간 시장이 과열됐다. 그 시기 마포구의 오프라인 매장은 물론 온라인에서도 개인 셀러들이 급증했다”며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팬데믹 동안 반작용도 적지 않았다. 수요는 늘었지만, 수작업이 ‘기본값’인 LP 제작의 특성상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이 시기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생겨 LP의 ‘희소가치’가 높아졌다. 설상가상으로 리셀러까지 등장, 가격도 나날이 뛰었다. 업계에 따르면 2020년 이전 2만원 정도에 책정된 LP는 팬데믹을 지나오며 2배 이상 올랐다.

엔데믹을 맞은 현재는 “거품이 빠지는 시기”라고 본다. 과열된 분위기를 벗었고, 음악 시장도 정상화됐다. 김 대표는 “유행따라 레코드라는 매체를 소비하던 때를 지나 진심으로 LP를 좋아하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LP 트렌드는 즐기는 세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LP 시대를 살아온 50대 이상에겐 ‘추억’이고, 2030 세대에겐 ‘새로운 경험’이다. 지금의 LP 문화를 이끄는 세대는 명실상부 MZ세대다.

업계에선 다른 문화 산업과 마찬가지로 LP를 소구하는 연령대는 2030이라고 본다. 특히 최근에는 10대 소비자도 많이 늘었다. 음악 장르에 따라 연령대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록과 메탈을 주로 다루는 도프레코드의 김윤중 대표는 “최근엔 10~20대가 많이 와서 구비하고 있는 LP를 팝 장르까지 확장했다”고 말했다.

현재 LP 시장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트렌드는 ‘뉴트로’(Newtro·새로운 복고)다. ‘경험한 적 없는 추억’의 트렌드가 MZ세대에게 불어닥치며 LP를 향유한 시절의 감성과 음악을 소환했다.

‘바이닐 로드’에 자리잡은 레코드숍에선 최정상 현역 가수들을 비롯해 LP가 소비되던 1980년대 제작된 음반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김영혁 대표는 “김밥레코즈를 오픈했던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신중현, 펄시스터즈, 김정미 등 1970년대 중고 LP가 인기를 모았다면 2010년대 후반부터 팬데믹 이전까지는 1980년대 활동한 이문세·유재하·빛과소금·김현철 등의 LP가 장악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음악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LP 구매로 이어진 점도 LP 붐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스트리밍 시대의 LP에는 ‘무형의 음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됐다. 단지 ‘추억 소환’이나 ‘좋은 음질’을 통한 ‘음악 감상용’ 매체가 아니라 ‘소장용 굿즈’로 자리한 것이다.

턴테이블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LP를 소비하는 세대도 등장했다. 지난 4월 북미 음악시장 분석 업체 루미네이트에서 발간한 ‘2023 톱 엔터테인먼트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미국에서 LP를 구매한 소비자 가운데 50%는 레코드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LP의 ‘예쁜 디자인’은 LP 시장을 이끄는 또 하나의 동력이다. 크고 다양한 표지 디자인이 주는 ‘시각적 만족’는 1020 세대를 LP 시장으로 끌어당기는 이유가 됐다. 과거 새까맣고 볼품없던 LP는 최근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는 “10~20대들은 잘 만든 디자인에 민감해 겉표지부터 레코드 색깔까지 총 천연색을 선호하고, 그러한 취향에 맞춘 LP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기도 다양하다. 10곡 이상 담아내는 12인치부터 2~3개 곡을 넣은 7인치 싱글까지 등장해 MZ 소비자를 유혹한다. 김영혁 대표는 “디지털 시대의 역설이 달라진 소비 형태를 불러왔다. 레코드 역시 기존의 굿즈처럼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소유하기 위한 다양한 소비재 중 하나가 됐다”며 “콘서트에 가서 프로그램북을 사고, 아트페어에서 도록을 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추세를 겨냥, ‘팬덤’을 갖춘 빅스타들이 LP를 경쟁적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같은 앨범 재킷과 레코드 판을 여러 가지 색상으로 찍어 판매한다. 김윤중 대표는 “최근 몇 년 사이 도프레코드에서 가장 독보적인 판매율을 기록한 LP는 테일러 스위프트”라고 귀띔했다.

특히 팬덤 사이에서 LP는 ‘굿즈’의 개념이자, 고가의 상품인 탓에 ‘신분의 차이’를 상징이기도 한다. 유명 가수의 LP는 보통 가격이 5만원에 달하는 데다 발매 수량이 많지 않아 온라인에서 이들의 LP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다. 500~3000장 한정 수량으로 찍은 K-팝 가수들의 LP는 온라인에서 200~300만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재발매 직전 아이유의 ‘꽃갈피’ LP가 이러한 사례다. 전문가들은 아직도 LP 트렌드의 전망을 밝게 본다. ‘문화 다양성’과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MZ세대에게 LP 문화는 잘 맞는 짝이기 때문이다. 김영혁 대표는 “LP 문화가 음악적 다양성과 문화적 균형에 기여하는 면이 있다”며 “레코드 산업이 스트리밍을 제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마포 일대에 레코드숍이 늘어나며 애호가들이 안착하고 있다는 것이 좋은 징조”라고 봤다. 최근엔 홈쇼핑, 온라인 등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의 턴테이블 판매도 부쩍 늘고 있다.


최규성 평론가는 “바이닐 문화는 이제 소수가 향유하는 트렌드를 넘어 일상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됐다”며 “젊은 세대들에겐 남들이 하지 않는 ‘힙’한 문화라는 인식이 자리한 상황에서 취향과 개성에 맞는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세대들을 통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바이닐 열풍은 스트리밍 시대의 역설이자, 베이비붐 세대를 향한 현 세대의 건강한 반격”이라며 “대량 생산, 스트리밍이라는 획일화된 문화의 정반대 개념인 바이닐 문화는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문화적 균형과 다양성에 기여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효율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음반의 비닐을 뜯고 판을 꺼내고 턴테이블에 올리는 느린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험이라는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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