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깨우기: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 전시 작품. 이정아 기자.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60점 중에 157점. 전시된 작품 가운데 ‘무제(Untitled)’가 달린 그림 수다. 작가는 단 3점을 제외하고,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작가는 질감이 완전히 다른 매체도 과감하게 넘나들었다. 캔버스 안에 존재한 패턴은 그림 밖 벽지로 뻗었다. 실크스크린으로 만든 그림은 거대한 조각으로도 변신했다. 제 방식대로 흡수한 표현주의와 팝아트, 미니멀리즘까지 여러 미술 사조가 한 데 뭉그러졌다.
“저는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이 저마다 달라 모순이 생길수록 더 좋습니다.”
작가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 이정아 기자.
신(新)라이프치히 화파로 주목받는 작가인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는 28일 서울 갤러리아 포레 더 서울라이티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 작품은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독일 라이프치히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29일부터 ‘그림 깨우기: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 전시가 열렸다. 크리스토프가 아시아에서 여는 최초의 개인전이다. 그의 작품 160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신작 20점도 포함됐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무선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사일런트 디스코’ 체험도 마련됐다. 이정은 UNC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는 “최근 현대미술이 갖는 개념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작업을 하는 즐거움 그 자체에 집중해 전시를 구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림 깨우기: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 전시 작품. 이정아 기자.
‘그림 깨우기: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 전시 작품. 이정아 기자.
전시는 ‘같은 작가 맞나’ 싶을 정도로 형태와 성격이 다른 여섯 가지 섹션으로 나뉘었다. 특히 섹션1 ‘그들은 춤추지 않는다, 발끝으로 노래한다’에서는 일명 드로스테 효과(Droste effect·그림 안의 그림 안의 그림)가 연쇄적으로 표현된 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 마치 작가가 춤을 추면서 그려낸 것처럼 역동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마지막 섹션6 ‘’메이크-업: 달라짐의 미학’에서는 전시의 형태가 절정에 이른다. 그림은 더이상 벽에 붙어 있지 않다. 인종이나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형형색색의 얼굴 그림이 허공에 나란히 펼쳐진다. 작가의 초기작들이다. 이를 보고 누군가는 멕시코 민속 조각을 떠올리고, 또다른 누군가는 중국 경극 가면을 생각해낸다. 여러가지 페르소나를 가진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엿보는 이도 있다.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는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고, 저마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라며 “논쟁을 띠는 서로 다른 의견 모두가 맞다”고 말했다.
‘그림 깨우기: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 전시 작품. 이정아 기자.
크리스토프는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독일 라이프치히를 무대로하는 그는 세계 미술이 주목하는 신라이프치히 화파 작가다. 신라이프치히 화파는 독일 통일 이후에도 회화의 순수성을 추구해온 작가군을 의미한다. 대표 작가로는 네오 라우흐와 리사 로이가 꼽힌다.
실제 전시장에서는 이미지를 조형적으로 해체하고, 회화적인 요소로 재조합한 작품들을 마주할 수 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상으로 표현 방식도 확확 바뀌었다. ‘손맛’이 느껴지는 회화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차원과 경계를 넘나들며 고정관념을 깨고 싶은 작가의 정교한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특히 과감한 색체와 단순화한 선을 통해 독일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미학이 돋보인다.
한편 크리스토프는 199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예술대학(발렌시아)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1993년에는 월트 디즈니 캐릭터 애니메이션 기금에서 펠로우십을 획득했다. 현재는 라이프치히에서 몇 년째 아트하우스 영화관을 운영 중이다. 전시는 이날부터 내년 3월 3일까지 더 서울라이티움 제1전시관에서 개최된다.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