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바그너’ 연광철 “독일어 가곡 부르려고 사투리까지 연구” [인터뷰] 
2023-12-05 15:36


베이스 연광철은 요즘 같으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K-클래식의 원조다. 세계적인 경연인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1993년)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단숨에 독일 주요 극장의 솔리스트 자리를 꿰찼다. 199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단역 야경꾼)로 데뷔한 이후로 이 무대에만 무려 150회 이상 섰다.[경기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 가곡은 온돌방에서 한복을 입은 느낌이라면, 바그너는 그들의 옷을 입고 직장에 출근하는 기분이에요.”

불과 닷새 사이, 시공간을 초월해 동서양을 가로지른다. 생애 첫 한국 가곡 콘서트(12월 3일, 예술의전당)로 잊었던 정서를 꺼내준 연광철(58)이 ‘주무기(?)’인 바그너로 돌아온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바그너 가수’라 불리는 만큼 그의 무대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다.

한국 가곡 공연을 마친 다음날인 지난 4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연광철은 이른 아침인데도 성량이 웅장하고 풍성했다. 그는 “집중을 많이 하고 긴장한 날 밤엔 잠을 잘 못 잔다. 공연을 마친 어제가 그런 날이라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며 웃었다.

한국에선 연광철의 무대도, 바그너의 무대도 흔치 않다. 코로나19 이전엔 2013년과 2016년에 단 두 번의 공연이 전부였다. 1990년대부터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며 2~3년치 스케줄이 꽉 차있다 보니 급박하게 콘서트 일정을 잡는 한국 공연계와 시간을 맞추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홍석원이 지휘하는 ‘경기필 마스터피스 시리즈’(7일 경기아트센터, 8일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일 곡은 연광철이 직접 골랐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다.

그는 “사실 베이스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공연은 많지 않다. 테너처럼 한 방이 없는 데다, 재미없고 지루하다”며 “베이스 가수가 오케스트라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언어·문화를 전달하는 성악가…“그들의 음악엔 그들의 옷을 입는다”

인터넷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없던 지난 1993년, 세계적 경연인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그는 우승을 차지했다. 무명의 한국인 성악가가 외신에 이름이 오르내린 건 일종의 ‘사건’이었다. 요즘 같으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K-클래식의 원조라 할 만하다. 연광철은 이후 단숨에 독일 주요 극장(1993~94 시즌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 오페라 극장, 1994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솔리스트 자리를 꿰찼다. 199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단역 야경꾼)로 데뷔한 이후, 이 무대에만 무려 150회 이상 섰다.

그는 언어와 소리에 까다롭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독일 거장 지휘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종신 상임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상임 지휘자로 예정된 크리스티안 틸레만,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에게 그는 섭외 0순위 성악가다. 바렌보임과의 인연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광철은 “바렌보임은 항상 지켜봐 주고, 독일 궁정가수(2018년)가 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해준 사람이고, 틸레만은 2002년 독일 영주(‘탄호이저’ 헤르만) 역할에 파격적으로 캐스팅해 커리어에 있어 한 단계 점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인연”이라고 했다. 2019년엔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는 자신의 취임 무대에 연광철을 성악가로 선택했다.


첫 한국 가곡 음반을 낸 연광철 [풍월당 제공]

유럽의 오페라 무대는 동양인 성악가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체구도 작고 겉모습부터 판이한 이방인.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그럴 듯하게 흉내낸다고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연광철이 독일인보다 독일어를, 이탈리아인보다 이탈리아어를 정교하게 구사하기까진 부단한 노력과 고민이 있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워 그들의 음악을 하는 것이기에 늘 새로운 접근과 시도를 해야 했어요. 그들의 음악엔 그들의 옷을 입어야 하니까요. 이방인이지만 그들처럼 보이고, 그들처럼 음악을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죠.”

연광철에게 성악가는단지 ‘좋은 소리’로 근사한 음악만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언어와 문화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가 공연을 하기 전에 음악 안에 담긴 문화와 정서를 곱씹어 체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언어를 완성하는 발음, 음악을 만드는 문화와 역사, 작곡가의 생애와 가치관 등을 수없이 공부한다.

‘언어의 맛’을 살리기 위한 과정은 언어학자이자 음성학자 못잖다. 각 지역마다 다른 언어의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독일어권 전역의 사투리를 녹음해 익혔고, 발음을 할 때 ‘울림의 위치’와 자음의 활용 방법까지 연구했다. 연광철은 “언어학자 수준은 아니지만, 성악적으로 내가 노래하고자 하는 언어를 2, 3층에 있는 관객에게까지 잘 전달하기 위한 테크닉은 연구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을 깊이 알기 위해 작곡가의 일생을 탐독한다. 그는 “바그너를 알기 위해 바그너가 쓴 논문과 글을 보며 그가 꿈꾼 세상을 이해하고, 바흐와 베토벤을 들으며 그의 음악적 뿌리와 아이디어를 찾아간다”고 했다.

‘연광철의 바그너’는 이탈리아 가곡처럼 ‘섬세하게’

바그너는 성악가에게 까다로운 음악이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처럼 성악가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고, 가수로서 제약도 많다. 그는 “바그너가 생각한 성악가는 텍스트를 불러주는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이라고 설명이다.

연광철의 노래엔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 수많은 가수가 바그너를 불렀지만, 누구와도 같지 않다. 남들과는 다른 면을 연구하고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 사람들은 바그너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높은 데다 텍스트도 모두 외울 정도로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가장 모범적이면서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바그너가 요구하는 음악적 해석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보통 바그너는 이탈리아 노래처럼 섬세하거나 정교하지 않고, 마초처럼 크고 거칠게 노래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바그너가 자신의 작품을 이탈리아 가수들의 테크닉으로 불렀을 때 굉장히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바그너도 벨칸토 창법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현대에선 오케스트라 편성과 극장이 커지며 달라졌지만, 더 섬세하게 부르는 것이 필요해요.”


베이스 연광철 [경기아트센터 제공]

사실 한국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아리아는 매우 낯선 공연이다. 연광철은 “바그너의 음악을 단지 성악, 소리 위주로 듣는다면 조금은 밋밋하게 다가올 수 있다”면서 “아는 만큼 들리고, 알고 들으면 더 흥미로운 것이 오페라 아리아”라고 말한다. 그는 프로그램 중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중세 유럽이 낳은 ‘희대의 연애담’으로 꼽히지만, 그 안엔 “우유부단한 왕의 탄식이 담겼다”고 귀띔했다.

‘바그너 가수’로 명성이 높지만,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엔 한계가 없다. 연광철은 “성악적으로 건강하게 오래 노래하려면 다양한 레퍼토리와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얼마 전까지도 50대 50 비율로 바그너와 이외의 곡을 소화했다”고 말했다. 내년 유럽 무대에선 모차르트 ‘마술피리’, 이탈리아 오페라는 물론 키릴 페트렌코와 함께 하는 바그너 ‘발퀴레’(2024년 3월·바덴바덴 부활절 페스티벌), 선우예권과 함께 하는 슈베르트 ‘시인의 사랑’(2024년 3월·예술의전당) 등도 준비 중이다.

세계적인 성악가가 된 지금도 그는 하루에 세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한다. 연광철은 “성대도 근육이기에 세월을 거스를 순 없다”며 “음악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트레이닝한다. 골프 선수처럼 매일이 연습”이라고 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연광철에 대해 “처음 만난 1993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 감동을 받는다”고 말할 정도다.

평생을 해왔지만, 노래를 향한 그의 마음은 변한 적은 없다. 이쯤하면 순애보에 가깝다. “일이고, 직업”이라지만, 그는 지치지 않는 특별한 ‘직업인’이다. “노래하기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에 즐거움이 있어 항상 노래하며 사는 거죠. (웃음)”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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