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가리던 그 나무, 갤러리에서 작품이 되다
2024-01-10 11:19


유화수 작가 [송은문화재단 제공]



▲ 유화수, 재배의 몸짓 이정아 기자


작가의 자택 앞 27년된 느티나무. 나무 기둥에 빨간 띠가 둘러져 있다.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달라는 한 주민이 표시한 수식이다. [유화수 작가 제공]

‘조망권을 해친다.’ 사지가 절단돼야 할 이유는 이처럼 간단 명료했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빌라 단지가 들어선 1996년부터 건물 한 켠에서 27년을 살아낸 느티나무 열두 그루는 그렇게 댕강, 절단됐다. 나무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이윽고 빌라 거주민인 작가 유화수(44)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나무 한 그루당 처리 비용 150만원’, ‘만장일치로 합의돼 제거’. 기습적인 통보였다.

“베어버리고 싶은 나무가 더 있다면, 누구든 빨간색 끈을 해당 나무 기둥에 둘러 표시해달라는 내용이 (문자에) 더 있었어요.”

이내 작가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정적. 담담하게 읊조리듯 전하는 그의 이야기에서 파르르 죽어간 생명의 허망함이 묵직하게 전해진다. 8일 서울 청담동 갤러리 송은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난 작가는 “사회 가장자리에 위치한 존재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시작된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전 작품에서도 장애인과 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대상을 자주 등장시켰다.

유화수는 송은문화재단이 진행한 제23회 송은미술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대상 수상작이기도 한 그의 신작은 ‘재배의 몸짓’. 잘 관리된 스마트팜 케이지에 토막난 느티나무 기둥이 누워 있다. 그런데 죽은 나무 기둥에 구름버섯이 더부살이로 기생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상품성 없는 버섯이다.

작가는 “집 앞에서 잘려나간 느티나무 기둥을 작업실에 가져왔는데, 어느 날부터 버섯이 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가 햇빛과 온도, 습도 등 생태 데이터를 수집해 기생한 버섯이 죽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적정 조건을 찾는데 골몰한 이유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고안된 첨단 기술 ‘스마트팜’이 인간에게 버려진 죽은 나무와 그곳에 기생한 쓸모없는 버섯의 생명을 연장하는 최상의 조건이 된 순간이다.

실제 작품을 보면 채광과 함께 분무 기능이 갖춰진 천장, 열을 감지하는 빨간색 온도 센서, 통풍을 위한 환기 시스템이 구현된 케이지가 버섯을 돌본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의 방향은, 그럼에도 어디로 향해야만 하는가. 작품 앞에서 다시금 되묻게 되는 이유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호흡기를 달고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만 하는 아기의 절박한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전시장 벽에는 작가의 자택 앞에서 잘려나간 작은 나뭇가지가 줄지어 설치됐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앙상한 나뭇가지가 온힘을 다해 부르르 떤다. 센서가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한 까닭이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공포에 질린 모습이다. 작가는 “이도저도 아닌 중간 그 어느 지점, 경계에 위태롭게 있는 대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이번 신작은 2021년 작가가 ‘잡초의 자리’ 개인전에서 전시한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그는 스마트팜 기술로 잡초를 길러내는 작품을 발표했다. 상추나 딸기 등 식용작물 중심으로 개발된 스마트팜 기술의 목적을 완전히 전복한 것이다. 작가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데이터는 많았지만, 정작 잡초를 잘 키우기 위한 조건을 찾는 연구는 찾을 수 없었다”고 부연했다. 그가 되려 제초제를 개발하는 회사의 도움을 받아 관련 데이터를 축적해나간 이유다. 이렇듯 목적 방향이 바뀌면 내용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배제된 대상이 겪는 문제이지, 단지 개인의 문제로 귀결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며 “약자라는 이유로 방치되거나 대중이 피하고 싶은 이야기를 불편하지 않게 전하는 게 작가의 몫”이라고 말했다.

한편 송은미술대상은 송은문화재단이 동시대 한국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2001년부터 매년 운영하는 미술상이다. 이번 공모에는 총 512명이 지원했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2000만원과 2년 이내 서울 청담동의 송은에서 개인전을 열 기회가 주어진다.

또 송은문화재단과 까르띠에의 후원으로 대상 수상작가의 작품 2점을 구입해 재단과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1년 입주 기회도 제공한다. 유화수를 포함해 남진우, 문이삭, 박웅규, 박형진, 백경호, 백종관, 신미정, 신제현, 이세준, 이우성, 이은영, 임노식, 장파, 전장연, 정서희, 정진, 허연화, 황문정, 황선정 등 제23회 송은미술대상 본선에 오른 작가 20명의 작품은 다음달 24일까지 송은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무료.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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