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진 내 마음 어떻길래…이상한 나라의 ‘낯선 도상’이 답했다 [요즘 전시]
2024-01-31 11:08


이상남, 마음의 형태, 2023. [페로탕 제공]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낯선 도상이 겹겹이 얽혀 있다. 원과 선,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들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 불친절한 이미지 앞에서 관람객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조형 언어를 완전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캔버스 앞에서 깨지고 부서지기를 수 차례.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느낌에 다다를 때면, 스스로 되묻게 된다.

지금 여기 있는 나의 마음은 어떤 모습인가.

31일 서울 청담동 페로탕 서울에서는 기하학적 추상 언어를 감상할 수 있는 작가 이상남(71)의 ‘마음의 형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미국 뉴욕으로 향한 작가가 지난 40여년간 그린 작품들 가운데 13점이 벽에 걸렸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보고 ‘이걸 그린 건가’ 생각하면, 형태를 비틀어 다른 도상을 만들었다”며 “결국 나의 작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나가는 관람객들과의 ‘비주얼 게임’”이라고 말했다.


이상남, 마음의 형태, 2014. [페로탕 제공]

작가의 그림은 그야말로 메타포(은유)의 향연이다. 캔버스에는 컴퓨터 그래픽 작업으로 구현한 듯한 뉴욕 브루클린 브릿지가 있다. 그러다 도식화된 증기기관차가 튀어나온다. 푸른 지구가 얼핏 보이다가도 그 너머 존재하는 듯한 태양계·우리은하가 눈에 담긴다. 이윽고 자로 잰 듯 깔끔하게 뻗은 직선에서 낡은 사회 제도가 떠오르고, 구불구불한 곡선에서 자유를 꿈꾸는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이 엿보인다.

작가는 “그림은 관람객을 위한 소재일 뿐, 보는 이들이 저마다 (내면에서) 편집하는 과정에서 작업의 의미는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했다. 그가 뜻이 불분명한 도상을 의도적으로 화면에 펼쳐 보인 이유다.


작가 이상남 [페로탕 제공]

1970년대 작가는 앙데팡당전에 참여해 자유자재로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는 박서보·이우환의 반(反) 전통적인 예술의 방식과 매체를 고민하던 시기를 보냈다. 이내 1981년 건너가게 된 뉴욕에서 작가는 한국에서 마주했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이미 사그라진 것을 발견했다. 에릭 피슬·데이비드 살레의 회화가 인기를 얻고, 이어 페미니즘이 미술계를 전복했던 뉴욕이었다. 작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 사이 샛길 어딘가서 나만의 언어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가 인류 문명이 온·오프라인에 남긴 것들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수집한 이유다. 그래서일까, 작가가 만들어낸 도상을 본 관람객들이 떠올린 심상은 저마다 다르다. 그렇다고 작가의 조형 언어 안에 의도한 맥락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작가는 “오브제를 수집하고, 선별하고, 이를 교묘히 비트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기와 저기’ 사이를 이동하고 표류하는 우리 인간의 삶이 담기게 됐다”며 “그 결과 마침내 1000여개에 달하는 도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이 세상에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원형·독창성)’는 없다”고 담담하게 전했다. 끝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엿보인달까.


이상남 개인전 마음의 형태, 전시 전경. [페로탕 제공]

이상남의 작품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마치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보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완벽하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캔버스 위에 붓칠을 하고 이를 사포로 갈아내는 과정을 50~100여 차례 반복한다. 기계적 도구로 예리하게 재단된 그래픽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작가가 손으로 정밀하게 그려낸 노동집약적 그림이다.

한편 해외 화랑가에선 단색화로 대표되는 한국미술의 계보를 잇는 흐름으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에 눈을 돌리고 있다. 작고한 정창섭, 박서보, 이배 등을 전속작가로 두고 전시를 이끈 프랑스계 글로벌 갤러리 페로탕이 세계에 소개할 올해 첫 한국 작가로 이상남을 선택한 이유다. 페로탕은 2016년 서울에 일찍이 진출했다. 한국 작가 개인전을 여는 것은 지난 2019년 박가희 작가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작가가 체계적으로 구상한 조형 언어를 시와 엮은 책(난다(문학동네))도 2월 중 출간될 예정이다.

전시는 3월 16일까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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