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감옥에서 진짜 해방되고 싶다면 [요즘 전시]
2024-02-05 20:55


‘야생 그대로의(Untamed)’ 연작이 설치된 2층 전시장 전경. 불이 꺼진 공간으로 관람객이 손전등으로 빛을 비춰 작품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에스더쉬퍼 제공]


‘야생 그대로의(Untamed)’ 연작이 설치된 2층 전시장 전경. 불이 꺼진 공간으로 관람객이 손전등으로 빛을 비춰 작품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이정아 기자.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칠흑 같은 어둠 속 전시장. 손전등 빛에 발견된 작품들이 신비롭게 자태를 드러낸다. 그림들은 ‘이콘화’라 불리는 중세의 성화(聖畵)와 닮았다. 그런데 이콘화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금박의 프레임에 둘러싸인 그림의 주인공, 성인이 아니다. 날뛰는 말이다. 유심히 보니 안장이나 말굽이 있어야 할 곳이 채색되지 않은 채 텅 비었다.

‘나를 추앙하라.’

인류의 서사에서 벗어난 가축화된 동물의 진짜 속내는 어쩌면 이렇지 않을까. 인간의 형상이 완전히 삭제된 이콘화에서 말은 뒷발로 설 정도로 거칠게 약동한다.


Etienne Chambaud, Untamed, 2023. [에스더쉬퍼 제공]

5일 서울 이태원동 독일 갤러리 에스더쉬퍼 서울에서는 프랑스 작가 에티엔 샴보(44)의 한국 첫 개인전 ‘프리즘 프리즌(Prism Prison)’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3개 층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어느 쪽에도 귀속되지 않는 상반된 개념의 이중성에 대해 표현하려고 했다”며 “동물의 형상이 기존의 내러티브에서 벗어나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얽혀 있는 역설적인 관계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가의 세계관은 각 층에 전시된 서로 다른 이름과 매체의 작품들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예컨대 1, 2층 전시장에서는 자유와 한계, 반대되는 두 개념이 뒤엉켜 존재하는 작품들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야생 그대로의(Untamed)’ 연작이 설치된 2층 전시장은 선사시대 동굴에서 희미한 빛으로 벽화를 살펴보듯 관람 체험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다. 작가는 관람객이 직접 손전등으로 빛을 비춰 작품을 발견하는 방식을 새로 고안했다.


Etienne Chambaud, Zebroid, 2024. [에스더쉬퍼 제공]

3층 전시장에 다다르자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 내달린다. 몸의 일부가 여러 차원에서 소거(消去·Erasure) 돼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말 조각들을 만나면서, 어쩌면 영원한 해방에 당도한 한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곳 바닥에 전시된 청동 조각 ‘지브로이드(Zebroid)’는 자유로이 배치돼 있다. 온전한 한 마리의 말과 분절된 파편 사이에서, 모호한 형상을 한 조각들. 몸체는 삭제돼 분할됐지만 오히려 역동적이다. 지브로이드는 얼룩말과 조랑말, 당나귀 등 다른 말 사이에서 태어난 교잡종을 일컫는다.

작가는 철학자 하이데거·데리다에 기대어 작품의 세계를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서양철학은 동일자의 탄생과 성장과 해체의 역사로 개괄된다. 서양철학이 동아시아 철학과 극명하게 다른 것은 철학적 사유가 ‘자기규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나로 인식하려면 내가 아닌 것을 타자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개념이 세계로 뻗어나가면, 영원히 변치 않는 내가 있다. 현상만이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전시를 보고 있노라면 질문이 무한히 확장된다. 말이란 무엇인가, 말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 인간은 어떤 말을 말이라고 인식하는가, 말이 말로써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여기서 말은 동물로도, 더 나아가 인간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존재에 대해 ‘있음’과 ‘없음’을 구분한다고 봤다. 인간은 말 한 마리가 존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은 인간을 넘어선 동물까지 자신의 존재를 실현해 가는 존재로 표현한듯 보인다.


Etienne Chambaud, Topos, 2024. [에스더쉬퍼 제공]

물론 끊임 없이 뻗어나가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다만 전시장 귀퉁이 곳곳 구석에 누군가 무심히 벗어던진 양말 한 켤레가 걸리적거릴 뿐이다.

이 작품은 청동 조각으로 구현된, 지극히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양말인데 작가는 이 조각의 작품명을 ‘토포스(Topos)’라고 지었다. 토포스는 장소를 의미한다.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가졌다. 진부한 문제에 매달리는 장소가 될 것인가, 새로운 논증을 발견하는 장소가 될 것인가.

“양말이 접히고 뒤집힌 형상을 도식화하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수학 공식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작가가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해보는 제안. 당신을 규정하는 세상의 모든 감옥에서 진짜 해방되고 싶다면, 매일매일 모양이 제멋대로 구겨지는, 자신의 벗은 양말을 들여다 보는 건 어떨지. 전시는 3월 9일까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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