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만원으로 시작한 ‘K-팝의 모든 것’...SM의 결정적 순간들
2024-03-22 11:04


4세대 K-팝 그룹 에스파와 1세대 K-팝 그룹 H.0.T [SM엔터테인먼트 제공]

“K-팝의 부모님”(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

“K-팝의 레거시”(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

“K-팝의 A~X, K-팝의 모든 것”(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

“K-팝의 흥망성쇠”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고, 지나온 모든 시간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늘 ‘최초’였던 SM엔터테인먼트는 한국 대중음악산업의 ‘교과서’였다. 때론 선구자였고, 때로는 ‘타산지석’이 됐던 K-팝의 처음과 끝이다.

1995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한 SM은 K-팝의 기틀을 세운 회사다. 1세대 K-팝 그룹으로 분류되는 H.O.T(1996년 데뷔)와 S.E.S(1997)를 시작으로 신화(1998), 보아(2000), 동방신기(2004), 슈퍼주니어(2005), 소녀시대(2007), 샤이니(2008), 엑소(2012), 레드벨벳(2014), NCT(2016, NCT127, NCT드림, 웨이션브이 포함), 에스파(2020), 라이즈(2023), NCT위시(2024)에 이르기까지 K-팝의 모든 시대에 SM이 있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SM은 특정시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앞서 나가며 K-팝의 테두리를 만들고 산업의 초석을 다지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말했다.


K-팝의 선구자...‘한류’를 외치다

“‘한류’가 솟아나고 ‘암표상’은 바쁘다.” (2000년 H.O.T의 중국 베이징 콘서트 당시 현지 언론 기사)

2000년 2월 중국 베이징 궁런 체육관. ‘소황제’로 불리는 중국의 청소년 1만 명이 H.O.T를 연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직접 만든 태극기 열쇠고리를 단 책가방을 메고 H.O.T가 가는 곳마다 학생들은 열광했다.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중국 현지 언론은 ‘한류(韓流)’라고 했다. 이 때부터 ‘한류’라는 말이 상용화됐다.

SM 설립 1년 뒤 세상에 나온 H.O.T는 K-팝 아이돌의 시작이었다. ‘시스템’이 전무했던 1990년대 한국 가요계에 체계적인 제작 방식을 도입한 곳이 바로 SM이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오디션을 열었고, 춤과 노래, 연기, 개인기에 이르기까지 ‘한 명의 스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A부터 Z까지의 모든 것을 트레이닝하는 ‘K-팝 시스템’이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

H.O.T의 등장으로 팬 문화 역시 달라졌다. 이들은 현재의 팬덤 문화는 물론 요즘 시대의 응원봉 격인 ‘풍선’ 응원을 시작하게 한 그룹으로, 현재의 K-팝 산업에 기반이 되는 모든 것을 구축했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1996년 H.O.T의 데뷔를 시작으로 연습생 아이돌 모델이 퍼져나갔고, 다른 가요기획사에 K-팝 시스템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H.O.T는 가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라고 말했다.

H.O.T와 S.E.S를 시작으로 1990년대 가요계를 장악한 SM은 2000년 4월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업 최초로 상장한다. 당시 시초가는 5323원. 상장한 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SM의 주식은 두 배로 뛰었고, 한 달 뒤인 6월엔 약 4배 가량 상승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SM은 기획사가 주도한 시스템을 통해 그룹을 육성하고 조직해서 데뷔시키며 아이돌 시장이 산업으로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보아 [SM엔터테인먼트 제공]

SM에게도 한국 가요사에 있어서도 2000년대는 ‘선구자의 시대’다. 1세대 K-팝 그룹(H.O.T, S.E.S)과 2세대(소녀시대, 샤이니 등) 사이에 등장한 보아와 동방신기는 한국 시장을 벗어나 해외 활동에 본격적인 닻을 올린 아티스트가 됐다. 이들은 대중음악 산업 간의 교류가 없던 척박한 황무지를 개척, 후배 K-팝 그룹이 동아시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2000년 8월, 만 13세의 나이로 데뷔한 ‘SM의 비밀병기’ 보아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해외 진출’의 길을 처음으로 열었다. 보아는 적극적인 현지화 전략으로 한국인 ‘최초’ 일본 오리콘 차트 1위(2002), 한국인 ‘최초’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진입(2008), 역대 ‘최연소’ 가요대상 수상, 여성 솔로 아티스트 ‘최초’로 ‘최다’ 음반 판매량 등을 기록한 ‘최초의 아이콘’이 됐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당시 한국 가수가 일본에 와서 일등을 했다며 현지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다”며 “일본 엔터테인먼트와의 합작 등 해외 진출의 문을 연 SM과 한국 가요사의 변곡점이 바로 보아의 등장과 활약”이라고 짚었다.

2004년 데뷔한 동방신기는 “H.O.T.의 진화 버전”(정민재 평론가)이자 “현재의 K-팝 아이돌 세계관의 초석”(임희윤 평론가)으로 볼 수 있다. H.O.T.의 퇴장으로 끝을 맺은 1990년대의 아이돌 시장을 2000년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 바로 동방신기였다. 정민재 평론가는 “지금의 아이돌은 동방신기의 데뷔와 직결한다”고 봤다.

동방신기가 가진 완벽한 아이돌적 특성은 K-팝 그룹의 이상향이 됐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군무와 탄탄한 라이브, 세련된 뮤직비디오와 스타일링은 SM 가수들의 독보적 차별점이자, ‘아이돌 그룹의 목표’를 제시했다. 지금도 동방신기는 가요계 관계자들이 꼽는 “가장 완벽한 아이돌”이다.

보아와 동방신기의 활약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상당한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가요계에선 본격적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을 겨냥한 음악을 만들며 해외 시장 진출을 중요한 목표로 뒀다. 보아와 동방신기가 ‘맨 땅에 헤딩’하며 깔아둔 고속도로는 타 기획사의 활로가 됐다.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 ‘SM 콘서트’.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아시아 넘어 팝의 본고장으로...푸른 눈의 팬덤이 온다

“내게 와줘서 고마워.” (SM 파리 콘서트 당시 해외팬들이 쓴 한글 문구)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SM 콘서트’. 푸른 눈의 청년 1만4000여명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열린 K-팝 콘서트에 찾아왔다. 삐뚤빼뚤한 한글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눈물을 쏟아내는 팬들의 열광에 파리의 경찰들은 SM 소속 가수들을 강강술래를 하듯 둘러싸고 경호했다.

당시 공연은 예매 10분 만에 매진이 됐고, 당초 1회로 예정됐던 공연은 2회로 늘렸음에도 티켓을 구하지 못한 관객들의 한숨 소리가 커졌다. 현지 팬 300명은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추가 공연을 요청하는 플래시몹 댄스를 췄다. ‘10대들이나 듣는 음악’으로 치부됐던 K-팝의 팬덤이 더 크고 견고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는 ‘아이돌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슈퍼주니어, 소녀시대와 샤이니, f(x)가 거둔 성취다.

2009년 당시 SM이 해외 시장에서 거둔 매출은 190억 원. 다음 해인 2010년 6월에는 280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도 매출을 넘어섰다. 2011년 역시 그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덕분에 당시 SM의 주가는 처음으로 2만원 대(2만 1023원, 2011년 6월 30일)에 진입했다. 덕분에 그 기간 시가총액 역시 4000억원을 넘어섰다.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 ‘SM 콘서트’.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당시 SM은 국내 음반 시장에서 30.8%의 점유율을 차지, 2위인 YG보다 4배 가량 높았다. 2011년은 YG에선 빅뱅(2006년 데뷔), 2NE1(2009년 데뷔), JYP에선 원더걸스(2007년 데뷔), 2PM, 2AM(2008년 데뷔)이 활동하던 때였지만 SM을 넘진 못했다.

파리 콘서트의 성공과 함께 SM은 2011년 10월엔 뉴욕 매디슨 스퀘어로 향했고, 2012년엔 전 세계의 경제성장 둔화와 유로존 위기에도 세계 시장 개척에 두 팔을 걷었다. 소녀시대가 K-팝 그룹 최초로 미국 토크쇼인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한 것도 2012년이었다.

이규탁 교수는 “그간 동아시아 중심으로 확장됐던 K-팝을 싸이의 ‘강남스타일’보다 앞서 동아시아 밖으로 이끄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해외 언론 역시 이때 SM이 이끄는 K-팝을 주목했다. 그 해 2월 미국 블룸버그TV는 시사 프로그램 ‘모노클’을 통해 ‘K-팝은 왜 한국 산업의 가장 잠재력 있는 무기가 됐나’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파워 브랜드는 보아, 소녀시대, 슈퍼주니어”라고 분석했다. 모노클은 특히 “K-팝이 유튜브를 통해 외국 팬에게 다가서며 디지털 시대 최선두에 섰다”고 강조했다.

2011년 프랑스 SM 월드투어를 기점으로 서구권에서 K-팝 열풍이 확인되자, 그 해 10월 미국 공연을 앞두고 분위기가 달아오른 SM의 주가는 사상 처음 4만원대(2011년 9월 29일)로 진입했다. 글로벌 시장 진출로 다음해인 2012년 SM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53% 성장한 1686억 원이 됐다. 이는 한국 엔터테인먼트사 최초로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기록이다.


엑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2012년 4월 데뷔한 12인조 보이그룹 엑소(EXO)도 선배들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기록 행진’을 시작했다. 엑소의 정규 1집은 발매 6개월 만인 2013년 12월 27일 100만장을 돌파, 국내 가요계에서 2001년 이후 12년 만에 밀리언셀러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엑소는 3세대 이후 불어닥친 K-팝 세계관의 완성이었다. ‘동방에서 네 명의 신이 일어난다’는 동방신기가 K-팝 세계관의 초석을 닦았다면, 멤버 한 명 한 명이 초능력자가 된 엑소는 “SF 판타지 그룹의 시초”(임희윤 평론가)였다. K-팝에 게임 같은 세계관을 입혀 충성도 높은 팬덤을 확보한 전략이다. 뿐만 아니라 엑소는 한국 활동 유닛 엑소-K, 중국 활동 유닛 엑소-M을 동시에 선보이며 한국과 중국을 동시에 공략했다.

소녀시대, 샤이니, 엑소와 함께 슈퍼주니어도 전성시대를 누렸다. 슈퍼주니어는 2013년 ‘슈퍼쇼5’ 공연의 일환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 남미 4개국 남미투어 공연을 열고, 총 4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2008년부터 이어왔던 단독 콘서트 ‘슈퍼쇼’ 월드 투어는 무려 135만명의 관객을 돌파했다. 소녀시대는 2013년 유튜브 뮤직어워드 메인 부문에서 올해의 뮤직비디오상을 수상, K-팝이 글로벌 시장의 변방이 아닌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NCT, 그리고 2024년 ‘K-팝 레거시’

H.O.T, 동방신기, 소녀시대, 엑소의 초·중반기까지…. 독보적 ‘1등 체제’를 구축했던 SM에게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2015년 11월, 엔터테인먼트사 최초로 시가 총액 1조원을 넘긴 SM은 2016년 그룹 NCT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 당시 이수만 전 SM 총괄 프로듀서는 “한류 3단계로 SM 문화 기술의 현지화”를 선언, NCT(New Culture Technology) 시대를 열었다.

NCT(Neo Culture Technology, 팀명)는 독특한 형태였다. NCT의 핵심 키워드는 확장성과 개방성. ‘NCT’라는 브랜드 아래 서울은 물론 일본 도쿄, 중국 베이징·상하이 등 주요 도시에서 각 팀이 순차적으로 데뷔한다. 멤버 수에 제한 없이 영입이 자유로운 신개념 그룹이다.

당시엔 다소 난해했던 NCT는 뒤늦게 성과를 보게 됐다. NCT를 중심으로 NCT127, NCT드림(NCT Dream), 중국 기반 웨이션 브이(WayV)에 이어 올해 NCT위시(NCT WISH)까지 데뷔하며 무한 확장에 성공했다. NCT 브랜드로 지난 한 해 팔아치운 앨범만 해도 약 1100만 장이다.

SM의 세계관과 컬처 테크놀로지가 접목한 다음 세대 그룹은 에스파다. 팬데믹과 맞물리며 데뷔한 에스파는 SM이 레드벨벳에 이어 6년 만에 선보인 걸그룹이다. 에스파의 핵심은 현실 멤버 4명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가 있어 총 8인조 그룹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완전히 초월하는 독특한 콘셉트였다. ‘미래의 아이돌’의 모습을 보여준 에스파는 “팬데믹 시대 4세대 걸그룹 시장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이 김도헌 평론가의 평가다.

에스파에 이어 지난해 보이그룹 라이즈, 올해 NCT위시까지…. SM은 그 자체로 ‘K-팝의 유산’이 됐다. 1990년대 중반 1세대 아이돌 시장에서 함께 경쟁했던 가요기획사들이 하나둘 사라질 때도 SM은 언제나 ‘최초’이자 ‘최고’로 가요계를 이끌었다.

물론 하이브 산하 레이블 빅히트뮤직의 방탄소년단(BTS), YG엔터테인먼트의 블랙핑크 등 3세대 그룹들이 세계 시장에서 사상 전례없는 성취를 거둔 2020년 이후 SM은 다소 주춤한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두드러지지 않아서다. K-팝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 신화를 써내려갈 때, SM이 늘 우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변수와 운, 탄탄한 전략을 세운 후발주자와의 경쟁에서 1위 자리를 내줬다.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SM의 저력은 꾸준했다”고 본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K-팝의 태동과 확장을 알린 SM이 끈질기게 동아시아 시장, 특히 중국 시장에 집중했다는 점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H.O.T를 시작으로 중국 시장을 발칵 뒤집었던 소속 그룹들의 행보, 이를 통해 현지 엔터테인먼트와의 합작이나 현지 멤버의 영입 등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통해 꾸준히 중국 시장에 공을 들였다. 슈퍼주니어 한경 등 그룹에 중국인 멤버를 그룹에 포함시킨 것도 SM이 최초였다. 하지만 2015년 사드 사태 이후 닫힌 대륙의 문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이규탁 교수는 “방탄소년단의 데뷔와 함께 빅히트뮤직이 동아시아 바깥 시장 진입을 위해 노력할 때, SM은 비슷한 시기에도 꾸준히 중국 시장에 집중했다”며 “여러 변수로 중국 시장의 불투명성이 커지고 K-팝 시장에서 동아시아보다 유럽, 북미 시장의 중요성이 높아지며 빚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희윤 평론가는 그럼에도 “SM의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하이브도 없었다”고 평가한다.

아티스트 관리에 있어서도 실책이 있었다. 동방신기를 떠난 JYJ(김재중·김준수·박유천)와의 소송, 슈퍼주니어와 엑소 중국인 멤버 탈퇴 등 논란이 적지 않았다. 김도헌 평론가는 “무엇이든 최초였기에 겪어야 했던 성장통”이라고 했고, 정민재 평론가는 “그룹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손실이나 다른 기획사엔 반면교사가 됐을 것”이라고 봤다. 이규탁 교수는 “계약 분쟁은 있었으나, 관계를 유지하는 그룹과 멤버들에겐 굉장한 의리로 가족 같은 끈끈함을 유지하는 기획사라는 점은 다른 회사에선 볼 수 없는 굉장히 독특한 지점”이라고 했다.

지난해 SM에선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가치를 입증했다. 가요기획사로는 유일하게 2세대부터 5세대까지 아우르는 그룹들이 모두 컴백해 활동한 것. 동방신기, 샤이니, 엑소, 레드벨벳, 에스파, NCT, NCT드림, NCT127, 웨이션 브이(WayV), 에스파, 라이즈 등이다. 그 결과 신규 음반 판매량은 사상 최대를 기록, 총 2100만장을 팔아치웠다. 전년인 2022년 대비 67%나 상승한 수치다. 매출액 역시 9600억원을 달성했다. 전년 대비 13% 늘었다.

지난 SM타운 라이브 2024 도쿄돔 공연에선 1세대 강타부터 5세대 라이즈와 NCT 위시까지 무대를 꾸미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SM타운’이라는 공동체의 단결이 만든 무대이자, SM의 음악적 정체성을 보여준 무대다.

정민재 평론가는 “오랜 시간 1등을 지켜온 SM은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실험성을 추구하며 음악적으로 확장, SM만의 음악적 레거시를 만들었다”며 “SMP(SM 뮤직 퍼포먼스)라는 독창적인 색을 구축하면서도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본령을 잊지 않았다. 샤이니의 음악이 NCT로, f(x)가 레드벨벳으로, NCT드림의 ‘캔디’의 성공이 라이즈로 내려오며 지속가능성을 가진 K-팝 기업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도헌 평론가는 “지난 한 해 경영권 분쟁 이후 안팎으로 휘청였지만, 그럼에도 SM은 K-팝 자체인 만큼 역량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것이 SM의 큰 힘”이라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영상 =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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