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의 발전 속도는 예측 불가능할 만큼 빨라지고 있다.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업계의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에 따르면 자사 그래픽처리장치 최신 버전인 ‘블랙웰’은 직전 제품보다 30배나 뛰어난 AI 추론이 가능하다.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는 이에 대해 “기술 발전의 속도로 환산하면 8년에 약 1000배 정도 성장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어떤 기술은 시장에 진입하는 단계에서부터 종종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기술과 기술이 융합된 제품이나 서비스는 더욱 그렇다. 기존 시스템에 맞춰서 적용되는 법적 규제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비록 안전성, 친환경, 개인정보 보호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고려하기 위해서이지만, 기술의 시장 진입이 늦어지면 자칫 과거의 규제가 미래의 혁신을 제한하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지난 2019년부터 신산업 활성화를 위해 신제품·서비스를 출시할 때 적용하는 규제를 유예(일시 면제)해 주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지난 5년간 6개 정부 부처가 1,200건에 달하는 규제 특례를 승인했는데, 산업통상자원부의 산업융합 규제 샌드박스는 승인 과제 수가 최근 누적 기준 500건을 돌파했다. 6개 부처 중 최초이자, 가장 많은(40%) 성과다. 후속 경제적 효과도 대단하다. 산업부 특례를 승인받은 기업들은 지금까지 1조20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였고 1,429명의 신규 고용을 창출하기도 했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 시행이 6년 차로 접어들면서 산업계의 관심과 활용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특례 부여의 양적 성과에만 만족하지 않고 후속 사업화와 법령 정비를 유기적으로 밀착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 주력했던 「샌드박스 1.0」에서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성과 창출에 초점을 맞춘 ‘샌드박스 2.0’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에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12개 전문 기관들과 함께 ‘산업융합 규제특례 지원단’을 구성했다. 에너지, 의료 바이오, 시험 인증 등 그동안 규제 혁신 필요성과 규제 개선 효과가 컸던 대표 분야를 중심으로 샌드박스 신청부터 승인, 종료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기업에 맞춤형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다.
또 앞으로 지원단을 통해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이나 혁신성이 높을 것으로 평가되는 규제 이슈를 선제적으로 발굴하여 새로운 과제를 기획할 예정이다. 기존에는 수요 기업이 필요에 따라 신청한 특례를 사후에 처리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개별 기업이 신청하기 전에 예측하여 대응하는 ‘찾아가는 샌드박스’인 셈이다. 혁신적인 서비스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서 제시하여, 후발 기업들이 따라오게 만드는 사전적 규제 혁신이기도 하다.
첨단 신산업에 진입하려는 기업에 규제의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걷어내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난달 열린 ‘제51회 상공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제도적 뒷받침이 늦어서 혁신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규제 샌드박스를 더욱 활성화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 시행을 통해 기업이 체감하는 규제 혁신의 성과를 만들 수 있도록 더욱 책임감 있게 지원할 것을 다짐한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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