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시론] 변곡점에 선 철도차량 시장
2024-06-13 11:14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글로벌 철도차량 분야 매출 1위를 지켜왔던 중국중차(CRRC)가 최근 몇 년 사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간 납품된 차량이 곳곳에서 기계적 결함에 의한 잦은 고장과 탈선을 일으켜서다. 품질에 대한 신뢰도 추락으로 저가 공세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면서 지멘스, 알스톰 등 전통의 강자를 중심으로 기술을 내세운 전략이 다시 주목받는 분위기다.

국내 사정도 다르지 않다. 노후 전동차 교체 등으로 제작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제작사의 과열된 가격 경쟁으로 인한 품질 저하로 업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저가로 수주한 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저가의 해외부품을 사용했고, 설계 또한 미흡하면서 고장이 속출했다. 제작사는 쏟아지는 하자 조치를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다. 부품 수급의 불안정성과 미흡한 설계에 따른 납품 지연은 수주 호황 속에서 오히려 제작사의 경영 여건을 악화시키고 있다.

우수한 품질을 갖춘 차량을 적정한 가격으로 납품하도록 할 수는 없을까. 철도차량 구매는 국가(지방) 계약법에 따라 통상 2단계 규격·가격 분리 동시 입찰로 진행된다. 기술 평가에서 85점 이상을 얻으면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가 수주를 가져간다.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이 함께 고려되므로 효율성이 높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국내 철도차량 제작 3사의 기술 변별력이 낮아 사실상 최저가 입찰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정 이상의 기술력을 확보하면 가격 출혈 경쟁이 승패를 가르는 구조다. 품질·가격·생산능력 등 종합적 판단은 기대하기 어렵다. 철도차량 구매의 새로운 평가 기준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고무적인 시도는 있었다. 지난해 서울교통공사는 5·7호선 노후 전동차 교체를 위한 입찰을 준비하면서 기술 평가를 강화하는 내용으로 사전 규격을 공개한 바 있다. 2단계 입찰 방식의 틀 안에서 그 폐해를 극복하고, 차량의 품질을 높이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부 입찰 관계자들이 사전 규격 공개를 보고 반대의견을 냈다. 결국 기존 안대로 입찰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종합평가낙찰제 도입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해외에서 널리 사용되는 방식이다. 납품 실적과 신용 평가에서 90점을 넘은 업체를 대상으로 가격, 품질, 기술력, 경영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높은 점수순으로 낙찰자를 결정한다. 발주기관에서는 복잡한 공정 관리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제작사도 적정 가격으로 수주한 덕분에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여력이 생길 것이다. 또 4만여 개의 부품을 납품하는 영세한 협력사와의 동반 성장을 도모하는 등 장점이 많다.

그러나 구체적 평가 기준과 방법 등이 행안부 예규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실제 적용이 어렵다. 현재는 유명무실한 제도지만,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철도차량 구매는 신뢰도 높은 업체를 선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싸고 좋은 차량은 없다. 저가 수주가 불러오는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가격이 아닌 기술력과 품질 중심으로 경쟁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철도차량 입찰 제도의 대수술이다.

안창규 서울교통공사 차량본부장



and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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