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그냥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교제살인으로 사망한 故 이은총 씨 사촌언니)
"더 마음 아픈 건 우리나라는 누군가가 계속계속 지속적으로 희생이 돼도 꿈쩍도 안한다는 거, 이게 더 비참한 거 아니에요? 지금 얼마나 더 죽어야 된다라는 거예요. 지금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그것도 나이 어린 피해자들이 그렇게 쏟아지고 있는데도"(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
27일 오후 10시 KBS 1TV '시사기획 창'에서 ‘죽어서야 헤어졌다’편이 방송됐다. 올해 초부터 연인에 의한 '교제살인' 사건이 부쩍 언론에 많이 등장했다. 요즘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안전 이별'이라는 검색어가 화제가 되고 있다.
수능 만점자 의대생의 강남역 교제살인, 연인을 살해하고 연인의 어머니에게도 흉기를 휘두른 김레아 사건, 교제 관계에 있던 60대 여성과 그 딸을 살해한 박학선 사건 등 올해도 이번달까지 최소 13명의 여성이 교제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2023년 한 해 동안 최소 49명의 여성이 연인에게 살해당했다는 충격적인 추산(한국여성의전화)까지 나오고 있다.
불안감이 높아진 여성들이 사귀던 남성과 헤어지기 위해서 이젠 안전한 이별 방법까지 찾아야 하는 사회가 됐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고, 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며, 막을 수는 있는 것일까? KBS '시사기획 창'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만났고, 판결문을 뒤졌고,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죽어서야 헤어졌다...'교제살인'에서 찾아낸 범죄 패턴
'시사기획 창'은 여러 피해자 및 유가족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사건에 일반화할 수는 없더라도 '교제살인'까지 이르는 과정에 일종의 패턴이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이별 통보 등으로 시작되는 갈등의 초기 단계, 가해자는 자해위협 등으로 피해자와의 관계를 지속해보려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첫 경찰 신고도 주로 이 단계에서 이뤄진다.
경찰 신고에서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으면 가해자는 더 심한 보복 폭행을 가하거나, 스토킹에 나서기도 한다. 심한 폭행으로는 '비치명적 목졸림(non-fatal strangulation)' 같이 관계 속에서 일방의 권력과 우월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행위가 흔히 나타났다. 이때 접근금지 등 적극적인 피해자 보호조처가 이뤄지지 않으면, 살인 같은 치명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배상훈 범죄심리분석관은 "교제폭력 가해자들은 대부분 의존형 장애가 제일 많다. 이병 통보를 받으면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느낌이 들고, 분노가 확 오르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이어 배 분석관은 "점진적인 폭력의 상승은 역진하는 경우가 없이 쭉 꾸준히 증가한다"고 말한다.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벽을 치거나, 혹은 밀침 같은 엄청나게 심각한 폭력같이 보이지 않는 행위라도 그러한 행동이 나타나는 사람은 멀리하는 게 좋다는 충고다.
교제폭력은 경찰이 출동해도 '반의사불벌죄' 원칙이 적용돼 보복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고, 기껏해야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지는데, 이건 무용지물이라고 한다. 접근금지명령은 결국 가해자의 의지에 의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74건의 죽음 '교제살인'... 은밀한 폭력의 흔적을 쫓다
연인 혹은 전 연인에 의한 죽음. 이들 죽음을 KBS는 '교제살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혼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가정 내 폭력과 구분되고 사귀는 사이에서 생긴 일이라는 점에서 일방적인 스토킹 범죄와도 다르다. 교제살인은 이 두가지 가정폭력범과 스토킹 범주에도 포함이 잘 안된다고 했다.
국가는 이들 죽음에 대해 공식적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시사기획 창'은 직접 교제살인 실태를 파악해보기로 했다. 판결문 검색 서비스에서 연인, 살인, 교제, 치사 등 다양한 검색어 조합을 통해 300여 건의 판결문을 확보하고, 일일이 내용을 확인해 연인 관계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만을 추렸다.
2021년부터 최근까지 3년 반 동안 모두 74건의 교제살인 사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인이 발생한 장소와 살해방법, 피해자 성별과 나이 등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교제살인의 양태를 꼼꼼히 짚어봤다.
-강압적 통제 속 예고된 죽음…"살릴 수 있었다"
"이것만, 이 단계만 잘 거쳐나가면 피해자 사망하지 않습니다. 정말 확신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는 그 여성들의 사건을 보고 들을 때마다 정말 다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다 살 수 있는 여자들이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의 말이다. 이 말처럼 정말 살릴 수 있었을까?
적어도 더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했을 법한 단계들이 있다. 74건의 교제살인을 살펴보니 실제 살인이 일어나기 전 폭행 등 다른 피해가 먼저 발생한 경우는 42%, 피해자가 가해자를 신고했던 경우도 전체 사건의 23%에 달했다. 폭행이나 피해자의 신고는 명백한 살인의 전조지만, 이 단계의 대응은 한계도 있다. 폭력의 가속이 급격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압적인 행위들을 '강압적 통제'라고 한다. 뭘 입을 것인지, 어디로 갈 건지, 누구를 만날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건지, 언제 귀가할 것인지 이런 것들을 다 상대방이 결정한다. 상대의 주체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령하고 지시하고 그것에 대해서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상태다.
설령 물리적 폭력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연인 혹은 부부의 관계가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일방이 상대방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관계에 있다면 이는 위험한 '강압적 통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관계를 벗어나려고 할 때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행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강압적 통제'는 교제살인의 매우 강력한 전조 현상이라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런 '강압적 통제'가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그 자체로 범죄행위로 인식해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2015년 중범죄법을 개정해 신체적 피해가 없는 '강압적 통제'만 나타나도 최고 5년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호주와 아일랜드도 '강압적 통제'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고 해외 입법 사례를 소개했다.
-"나 같은 피해자 다시 없게…"
이제 이 오랜 폭력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 온 사회가 응답해야 할 때이다. 입법, 사법, 행정은 물론이고 온 사회가 나서야 한다.
사실 이미 늦었다. 19대 국회 이후에 교제폭력에 대한 입법 공백을 메우기 위한 법안이 9건이나 발의됐지만 모두 폐기됐다. 이 법안들 상당수는 교제살인 방치책으로 거론된 '반의사불벌 조항 폐지'와 가해자와 피해자가 즉각 분리될 수 있도록 하는 '적극적 보호조치'를 담고 있던 법안들이었다.
그사이 정확한 수조차 확인되지 않는 여러 교제살인 피해자가 목숨을 잃었다. 올해 개원한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3건의 교제폭력 관련 법안은 어떻게 될지를 주시하고 있다.
2020년 교제살인으로 두 딸을 잃은 나종기 씨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아요. ‘내 동생이다, 내 누나다, 내 어머니다’라는 마음으로 한 번쯤은 돌아봐 주셨으면… 저는 이미 애들을 잃었지만, 저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아야 하잖아요. 이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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