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손주 얼굴 공개한 불법추심…할아버지는 퇴직금까지 털어넣었다 [사채 탈출기①]
2024-10-19 08:01


지난 9월 사설 채무정리 컨설팅업자 A씨가 불법사금융 피해자의 채무 내역을 살피고 있다. 정호원 기자.

우리나라 가계대출 1800조원 중 불법사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로 인한 피해는 추정이 어려울 정도로 크다. 채무자 뿐 아니라 가족들의 신상과 사진을 공개하고 협박하는 불법 추심은 날로 고도화되고 있다. 피해자의 삶을 파괴하고 생존을 위협한다.

문제는 법 밖에서의 피해는 구제가 어렵다는 데 있다. 이같은 허점을 파고든 게 ‘사설 채무정리업자’다. 업계의 생리에 능통한 이들은 사채업자와 교섭해, 피해자들을 추심으로부터 해방한다. 구원의 대가로는 값비싼 수수료를 받는다.

하지만 법망을 벗어난 지라, 돈만 받고 채무 정리는 외면하는 사기 범죄도 잦다. 사금융의 늪에서 또다시 법 밖의 지푸라기를 잡은 이들은, 정부가 ‘불법사금융과 전쟁’을 선포한 만큼 좀 더 피해 구제에 적극적이여야 한다고 호소한다.

헤럴드경제는 이에 총 여섯 편에 걸쳐 불법사금융 피해 구제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정부 지원책의 실효성을 들여다봤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이들을 조건 없이 지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과거 잘못으로 발목잡혀 고통받는 이들 역시 정부가 보호해야 할 국민이다.

[헤럴드경제=정호원·김광우 기자]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는 겁니다. 다음에 다시 올거면, 그땐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사설 채무정리 컨설팅업자 A씨가 불법사채 채무정리를 하기 위해 찾아온 김씨(32·여)에게 연신 호통쳤다. 얼굴을 구긴 A씨는 김씨의 은행 입출금 거래 명세서에 형광펜을 치면서 꼼꼼히 사채 거래 현황을 파악했다. 어떤 사채업자의 추심이 가장 심한지,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은 얼마인지를 따지고 나면 사채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20여명의 사채업자에게 전화해 원금과 법정이자율 내에서 채무를 정리하자고 설득하는 데 꼬박 5시간이 걸렸다.

채무정리 상담시간 내내 김씨의 휴대폰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로 내내 울렸다. 김씨 휴대폰 배경화면 속 초등학생 아들이 환하게 웃다가 사라졌다. 추심 전화에 응대하느라 좀처럼 일이 진전되지 않자 A씨는 한숨을 쉬고는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김씨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답했다.

살기 위해 수백만원의 컨설팅 비용까지 지불하며 채무 정리를 했지만 김씨의 표정은 쉽사리 밝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김씨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행히 아버지의 실종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발견돼 응급실로 옮겨져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김씨는 곧바로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채무 정리를 마치고 집에 오던 길, 아버지에게 “오늘은 혼자 있겠다”며 집을 나선 이후였다.


서울 한 거리에 불법사금융 전단지가 놓여 있다.[연합]

불법사금융 피해자들이 악성 고리대의 악순환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사설 채무정리 업자를 찾고 있다. 이들이 받는 수수료는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대에 달했다. 그런데도 사채업자와 '담판'을 짓는 사설 채무정리업자는 유일한 구원자로 여겨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기댈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호사 외에 수수료를 받고 채무대리 업무를 하는 것은 불법의 영역이다. 심지어 채무정리를 명목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에 정부로부터 외면받은 피해자들의 이중고가 더해지고 있다.

‘원금 1000만원에 수수료 200만원’ 가혹한 불법사금융 청구서


지난 9월 헤럴드경제는 사설 채무정리업자 A씨의 사무실을 방문해 김씨의 채무 정리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 싱글맘이자 무직인 30대 여성 김씨는 56건의 사채를 ‘돌려막기’하고 있었다. 20살 때부터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한 김씨는 최근 들어 우울증 약을 장기간 복용했다. 도박 중독 증상도 더 심해졌다. 돈이 부족해지자 사채를 쓰기 시작했다. 2주 사이 사채업자에게 5600만원을 빚졌다.

불법추심은 김씨의 존엄성마저 뭉개버렸다. 김씨 가족과 지인들은 “와이프 있는 유부남이랑 조건(만남) 하다가 임신해서 낙태비 필요하다고 개인정보 팔아 돈 빌려놓고 잠적함”, “긴급수배자 찾습니다. 지금 문자 받은 분 모두 개인정보 유출 당했습니다” 등의 문자를 수시로 받고 있었다.


불법사금융 피해자 김씨가 사채업자로부터 받은 문자. 정호원 기자.

김씨를 향한 불법추심 강도도 점점 세졌다. 돈을 빌려주면서 김씨의 초등학생 아들 사진과 신상을 요구한 사채업자는 SNS에 이를 공개했다. 김씨에게는 “(초등생 자녀) 팔고 돈 버는 x 주제에” “남편하고 이혼하는 김에 낙태시키지 xxx 못생김” 등의 문자를 보냈다.

김씨의 아버지는 딸의 사채 문제를 뒤늦게 알았고, 그 충격으로 안면 마비까지 겪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손주의 얼굴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공기업 퇴직금을 미리 수령해 사설 채무정리 업자 A씨를 찾았다. 김씨는 56건의 채무 중 16건의 원금을 상환하고 A씨에게 상담 명목의 수수료 220만원을 카드로 지불했다. 사채업자에게 갚은 원금이 1100만원인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지난 9월 사설 채무정리 컨설팅업자 A씨가 불법사금융 피해자의 채무 내역을 살피고 있다. 정호원 기자.

불법사금융 피해 규모가 커지면서 김씨처럼 사설 채무정리 업자를 찾는 피해자들도 늘었다.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채무정리업을 시작한 A씨는 “그간 7000여명의 사람이 상담을 받았다”고 말했다. A씨는 “전화 상담 3만원, 채무 종결 건당 7만7000원의 수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A씨는 자신이 운영 중인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해 유튜브 등에서 활발히 상담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날 채무정리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채무정리 과정을 촬영한 A씨는 “나중에 영상을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A씨가 운영하는 상담 홈페이지에는 한 달 새 37명의 피해자가 사채해결 후기글을 남겼다. “어제까지 지옥이었지만, A씨를 만나 천국행 급행열차를 탔다”, “보복당할까 봐 걱정했지만 문제 없었다. 이 글을 보는 분들, 고민말고 A씨를 찾아가라”는 등의 ‘간증’이 이어졌다.

“금감원, 경찰 모두 못 믿겠다” 유일한 탈출구도 불법


[게티이미지뱅크]

불법사금융 피해자는 금융당국과 경찰이 아닌 ‘사적 구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설 채무정리업자를 찾기 전 경찰에 먼저 신고는 안 했느냐는 질문에 김씨 아버지는 “경찰은 믿을 수 없었다”고 답했다. 김씨는 “경찰에게 진술하면 돈을 빌리게 된 이유를 밝혀야 하고, 개인정보유출 등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의 피해 지원도 소용없었다는 게 피해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불법 추심을 당한 뒤 금감원에 직접 찾아갔다는 한 불법사금융 피해자는 “막상 가보니 별다른 안내 없이 법무사를 찾아가 보라는 말만 돌아왔다”며 “변호사에게도 문의했지만 당장의 추심피해를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와, 결국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사설 채무정리업자 A씨는 “변호사나 정부가 하지 못하는 (채무자 대리) 업무를 자신은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채무정리업자는 대포폰과 대포통장 뒤에 숨은 불법사금융업자에게 직접 연락해 채무를 종결하는 일을 맡지만 변호사는 업무량이 많아 채무정리를 담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법상 변호사 외에 채무자를 대리하고 수임료를 받는 행위는 변호사법 위반 소지가 있다. 변호사법 제109조 제1호는 “변호사가 아니면서 금품을 받고 대리·중재·화해·법률상담 등을 취급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서울 한 거리에 추심업체 광고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정호원 기자.

채무정리를 명목으로 수수료만 챙겨 달아나는 신종 사기도 문제다. 금감원은 9월 솔루션업체들이 불법사채 해결 명목으로 수수료를 요구하는 등 불법중개수수료가 성행하고 있다며 금융소비자 경보 ‘주의’를 발령했다. 솔루션업체는 금감원, 법무부, 검찰 등 정부 기관들을 홈페이지 하단에 제공하거나 불법업체 제보 시 포상금도 지급한다는 등 공신력 있는 기관인 것처럼 오인하도록 홈페이지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에 사적 구제마저 어려운 피해자가 기댈 곳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법사금융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채무정리 업무를 수행해온 비영리단체 주빌리은행의 유순덕 사외이사는 “A씨처럼 피해자에게 돈을 받고 상담해 주는 업체는 상담비를 낼 여력조차 없는 채무자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며 “(주빌리은행에 찾아온) 한 채무자는 채무정리업자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상담비 60만원이 없어서 불법추심에 시달린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한편 1,2 금융권뿐만 뿐만 아니라 제3금융권이라 불리는 대부업에서조차 신용대출을 줄이면서 자금줄이 막힌 채무자들이 불법사금융으로 내몰릴 처지에 놓였다. 금융당국에서는 대부업 규제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저신용자 대출수요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모색이 함께 병행돼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채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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