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겁박한 불법 추심…조부는 퇴직금도 넣었다 [이슈&뷰]
2024-10-21 11:35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는 겁니다. 다음에 다시 올거면, 그땐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사설 채무정리 컨설팅업자 A씨가 불법사채 채무정리를 하기 위해 찾아온 김씨(32·여)에게 연신 호통쳤다. 얼굴을 구긴 A씨는 어떤 사채업자의 추심이 가장 심한지,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은 얼마인지를 따지고 나면 사채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20여명의 사채업자에게 전화해 원금과 법정이자율 내에서 채무를 정리하자고 설득하는 데 꼬박 5시간이 걸렸다. ▶관련기사 4면

채무정리 상담시간 내내 김씨의 휴대폰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로 내내 울렸다. 김씨 휴대폰 배경화면 속 초등학생 아들이 환하게 웃다가 사라졌다.

살기 위해 수백만원의 컨설팅 비용까지 지불하며 채무 정리를 했지만 김씨의 표정은 쉽사리 밝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김씨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행히 아버지의 실종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발견돼 응급실로 옮겨져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김씨는 곧바로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채무 정리를 마치고 집에 오던 길, 아버지에게 “오늘은 혼자 있겠다”며 집을 나선 이후였다. 불법사금융 피해자들이 악성 고리대의 악순환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사설 채무정리 업자를 찾고 있다.

이들이 받는 수수료는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대에 달했다. 그런데도 사채업자와 ‘담판’을 짓는 사설 채무정리업자는 유일한 구원자로 여겨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기댈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호사 외에 수수료를 받고 채무대리 업무를 하는 것은 불법의 영역이다. 심지어 채무정리를 명목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에 정부로부터 외면받은 피해자들의 이중고가 더해지고 있다.

▶‘원금 1000만원에 수수료 200만원’ 불법사금융 청구서=지난 9월 헤럴드경제는 사설 채무정리업자 A씨의 사무실을 방문해 김씨의 채무 정리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 싱글맘이자 무직인 30대 여성 김씨는 56건의 사채를 ‘돌려막기’하고 있었다. 20살 때부터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한 김씨는 최근 들어 우울증 약을 장기간 복용했다. 도박 중독 증상도 더 심해졌다. 돈이 부족해지자 사채를 쓰기 시작했다. 2주 사이 사채업자에게 5600만원을 빚졌다.

김씨를 향한 불법추심 강도도 점점 세졌다. 돈을 빌려주면서 김씨의 초등학생 아들 사진과 신상을 요구한 사채업자는 SNS에 이를 공개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딸의 사채 문제를 뒤늦게 알았고, 그 충격으로 안면 마비까지 겪었다. 이에 공기업 퇴직금을 미리 수령해 사설 채무정리 업자 A씨를 찾았다. 김씨는 56건의 채무 중 16건의 원금을 상환하고 A씨에게 상담 명목의 수수료 220만원을 카드로 지불했다. 사채업자에게 갚은 원금이 1100만원인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불법사금융 피해 규모가 커지면서 김씨처럼 사설 채무정리 업자를 찾는 피해자들도 늘었다.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채무정리업을 시작한 A씨는 “그간 7000여명이상담을 받았다”고 말했다. A씨는 “전화 상담 3만원, 채무 종결 건당 7만7000원의 수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금감원, 경찰 모두 못 믿겠다” 유일한 탈출구도 불법=불법사금융 피해자는 금융당국과 경찰이 아닌 ‘사적 구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금융감독원의 피해 지원도 소용없었다는 게 피해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불법 추심을 당한 뒤 금감원에 직접 찾아갔다는 한 불법사금융 피해자는 “막상 가보니 별다른 안내 없이 법무사를 찾아가 보라는 말만 돌아왔다”고 했다.

이에 사적 구제마저 어려운 피해자가 기댈 곳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법사금융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채무정리 업무를 수행해온 비영리단체 주빌리은행의 유순덕 사외이사는 “A씨처럼 피해자에게 돈을 받고 상담해 주는 업체는 상담비를 낼 여력조차 없는 채무자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며 “(주빌리은행에 찾아온) 한 채무자는 채무정리업자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상담비 60만원이 없어서 불법추심에 시달린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정호원·김광우 기자



w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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