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배우'故김수미를 추모함[서병기 연예톡톡]
2024-10-26 15:52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25일 75세의 나이로 별세한 故김수미 배우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특6호실에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맨발의 기봉이'의 '엄기봉' 신현준은 가장 먼저 빈소에 도착해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영화에서 고인과 모자(母子) 관계로 만난 이후 계속 엄마로 모셨다.

이어 '전원일기'의 아들 '일용이' 박은수와 조인성, 유재석, 염정아, 최지우, 유동근 전인화 부부, 최명길, 김형준, 영옥, 김용림, 박정수, 송옥숙, 임호, 전혜빈, 박원숙, 정준하, 윤정수, 김희철, 이연복 최현석 셰프 등도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전원일기'를 통해 오랜 인연을 이어갔던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빈소에서 침통한 표정이다. 고인과 각별한 관계인 탁재훈과 이상민은 해외 촬영중이라 아직 빈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진정한 평가는 사후에 이뤄진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속담도 있잖은가. 故김수미 별세 소식에 새삼 그 사람의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인은 참으로 발이 넓었다. 연예계에서 고인의 음식을 안 받아본 사람이 별로 없다.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배우 뿐만 아니라 예능인, 가수, 셰프 등 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요즘은 탤런트라는 말이 거의 사라졌는데, 김수미 배우는 배우이자 방송인이고 비극에서 희극까지 아우르는 표현 그대로의 만능 탤런트다. '일용엄니'로 각인되어 '국민 엄니'라 불리지만 보다 다양한 역할이 주어졌어도 충분히 아우라를 보여줬을 배우라 생각한다"면서 "국내에는 몇몇 국민엄마가 존재하는데 김수미 배우는 욕을 해도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로 친근한 국민엄니"라고 말했다.

내가 어릴 때는 '전원일기'의 양촌리와 같은 시골이 아니어도 도시의 동네에서도 '일용엄미' 같은 아주머니 또는 할머니가 한명쯤은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이 놀다 싸우면 해결사 역할도 해주는 할머니다. 나는 그 할머니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동네에서 세게 놀지 못하고 적당히 논 기억도 있다.

故김수미 배우가 '전원일기'에서 일용 엄마를 맡았던 때는 31세인 1980년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평범한 할머니가 껄쭉한 사투리와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솔직한 모습을 보이면서 시청자에게는 금세 친근감이 생겼다.

그래도 고인은 젊었을 때는 이국적인 외모에 멜로형 배우였다. 하지만 '전원일기'로 그의 이미지는 굳어져갔다. 이러한 '센 캐'를 활용한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3, 영화 ‘마파도’ ‘가문의 영광’ 등으로 고인의 활동은 이어졌다.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3에서 욕을 맛깔스럽게 하며 나쁜 사람을 처단하는 뱀파이어 이사벨 역할은 김수미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배역이었다.

'전원일기'를 22년간 연기하는 것은 배우로서의 소명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동네 아줌마 '일용엄마'역이면 몇 신 되지 않는 조연이다. 몇년간 '전원일기' 맛을 보고 하차해 이미지 관리를 하며, 다양한 작품에 출연할 수도 있었다.

김혜자 배우가 "(김수미는) 한국이 아니고 외국에서 태어났으면 정말 다양한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고인의 능력과 재능이 아깝다는 뜻이다. 한국 플랫폼에서는 각종 제약으로 고인을 담을 그릇이 부족했다.

9년전인 2015년 KBS 예능 '나를 돌아봐'는 故김수미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잘 반영됐다. 형식적으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위해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라며 연예인에게 매니저 역할을 부여했지만 결코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너무 앞서간 예능으로 단명한 콘텐츠이기도 하다.

'나를 돌아봐' 제작발표회는 고인의 아들이 운영하는 반포 소재 예식장에서 이뤄졌다. 출연자들인 '센 캐'들이 대거 모였다. 고인은 '센 캐' 중의 '센 캐'였다. 이경규는 주눅이 들어 순한 양이 된 상태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고, 박명수와 이홍기는 계속 고인에게 구박을 받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빵빵 터졌다.

이날 고인이 "원래 이경규-조영남은 세 팀 중에서 분당시청률이 가장 낮게 나왔다"고 하자 조영남이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하차를 선언하고 나가버렸다. 무슨 막장극을 보는 것 같았다. 제작발표회의 이런 돌출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위태로운 신종 예능의 가능성만을 볼 수 있었다. 기자들도 극리얼인지, 콘셉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 제작발표회는 중단됐다.

고인은 당시 '정글의 법칙' 등 인기예능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세게 갈 필요가 있다는 분위기에 맞춰 '고도로 의도된 초리얼 전략'을 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받아서 랠리로 이어질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故김수미는 기가 세기만 한 게 아니라 열정도 굉장히 강했다. 캐릭터에 충실하다 보니 호탕한 모습과 솔직한 입담을 보여주었으나, 작품에서 내려오면 정 많고 의리있는 사람이란 게 고인을 아는 사람들의 얘기다.

'나를 돌아봐' CP였고 현 ENA 대표이사인 김호상 PD는 "'나를 돌아봐'의 CP를 맡으면서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도 자주 소통해왔다. 저희 ENA프로그램 '현무카세' 모니터도 해주시면서 새 프로그램 아이디어도 주시고 활동의 열정을 보였다"면서 "저에게는 아들처럼 대해주셨다. 5년전에는 칠순잔치에 초대되어 방배동 집에서 축하자리를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김수미 선생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고 까칠한 분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이 많고 의리있고 한없이 따뜻한 분이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너무 일찍 떠나 안타깝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하게 계시길 바랍니다"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요즘 처럼 다양한 성격의 플랫폼이 있다면 젊은 시절부터 故김수미의 활용 폭이 더욱더 넓어졌을 것이다. 고인은 드라마의 캐릭터나 예능의 성격을 더욱 다변화 시킬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독한 캐릭터를 선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변화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른바, 불편함, 비호감을 파는 시대에 이유 있는 불편함과 비호감이라면 문제될 것도 없다. 요즘은 이렇게 독설을 하며 '후배'들을 하나씩 챙기는 '선배'가 그립다. 알고보니 '애정에 바탕을 둔 독설'이었다.

고인은 여러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수미네 반찬’, ‘수미산장’ 등 예능과 홈쇼핑에도 출연해 요리와 음식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시와 에세이를 쓰는 작가로서도 이름을 남겼다. KBS2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와 tvN 스토리 ‘회장님네 사람들’, 뮤지컬 '친정엄마'까지 출연했다.

당뇨 수치가 500이 넘게 나왔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런 상태에서도 너무 일을 많이 한 것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김수미의 아들인 정명호와 배우 서효림 부부는 "엄마가 집필하던 책 제목이 '안녕히계세요'였다"고 알려주었다. 이 말은 우리가 고인에게 하고싶은 말이기도 하다 "안녕히 계세요. 수미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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