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금융위원회가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주최한 ‘기업 밸류업을 위한 상장기업 간담회’. [헤럴드DB]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 발의된 가운데 이 법이 시행될 경우 인수합병이나 기업 구조개편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주주들이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남발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 기업 친화적인 미국에선 이사의 책임을 제한하거나 면제하는 장치를 두고 방어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인수합병 과정에서 여전히 주주 소송이 남발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경제인협회(이하 한경협)는 4일 ‘미국 M&A 주주대표소송과 이사충실의무’ 보고서에서 영미법계의 이사 신인의무 법리를 한국 상법에 무리하게 도입하는 것은 법 체계에 맞지 않다며 이같이 밝혔다.
신인의무란 이사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주의 의무와 이사가 자신의 이익보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충실의무 등을 의미한다.
한경협은 2009~2018년 미국 상장회사의 1억달러 이상 인수합병 거래 1928건를 분석한 결과 매년 71∼94%의 거래에 대해 주주대표소송이 제기됐다. 주주들 간의 이해득실도 달라 기업들은 인수합병 거래 1건당 평균 3~5건의 주주대표소송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경협은 “미국에서는 통상 인수합병 계획이 발표되면 일부 주주가 공시정보 부족이나 중요사항 누락 등을 이유로 이사 신인의무 위반주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다. 이후 회사와 원고는 ‘단순 추가공시’나 ‘합병대가 상향조정’ 정도로 화해(Settled)하거나 소를 취하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회사는 인수합병 진행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원고측 변호사에게 거액의 수수료를 제공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일종의 인수합병 거래세가 되고 있다.
다만 미국은 이사의 책임을 제한 또는 면책해주는 ‘경영판단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을 통해 이사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사가 권한 내에서 행위를 했다면 비록 회사에 손해가 발생해도 개인적 책임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1988년 델라웨어주 법원이 판례로 처음 원칙을 수립한 이래 법원에서 이사의 경영책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됐다.
델라웨어주 회사법은 이사의 책임을 면제하는 조항도 있다. 이사가 고의로 법령을 위반하거나 부당한 사익을 취한 것이 아니라면 회사 정관을 통해 이사의 경영책임을 포괄적으로 면제해 주는 것이 가능하다.
미국은 이처럼 이사의 면책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지만 인수합병 과정에서 여전히 소송 남발을 막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국 상법에도 이사 책임 면제 조항이 있지만 주주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주주 수가 수백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상장회사에는 비현실적인 조항이라는 지적이다.
이사의 경영판단에 대한 형법상 배임죄 적용도 기업인들에게 큰 부담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 할 경우 이사에 대한 주주대표소송뿐만 아니라 배임죄 고발도 빈발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민법상의 위임계약에 근거해 이사의 책임 범위를 설정한 우리 상법에 미국식 이사 신인의무 법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법 체계에 전혀 맞지 않다”며 “주주에게 별다른 이익도 없고 기업들은 소송에 시달려 기업가치 하락의 우려가 큰 만큼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는 상법 개정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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