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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세 골프소설 23] 남편 장례식날 골프 친 메리
뉴스| 2022-04-30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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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앤드루스의 레이디스클럽 1894년 딩시 사진.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글래스고 골프장에 여왕이 모습을 보인 때는 남편이 살해된 후 3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티박스에서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메리는 아무 생각 없는 듯했다. 남편이 죽은 지 이틀 만에 골프장에 나가 골프를 쳤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타살의 의혹이 공공연하게 나돌던 민심은 여왕에게 타고난 요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메리 여왕은 국민들의 신임에는 아랑곳 않았다. 오히려 남편의 타살에 연루돼 의심을 사고 있던 제3의 인물인 제임스 햅번과 즉각적인 결혼을 서둘러 버렸다. 세번째 남편이 된 헵번은 에딘버러 인근에 위치한 바드웰시의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단리가 살아있었을 당시에도 메리의 또 다른 정부로 의심받던 인물이었다.

정적들에 둘러싸여 늘 불안했던 메리를 헵번은 보듬고 있었다. 여왕이기 이전에 한 여인으로서 외로움을 안고 사는 메리가 그의 눈에는 안쓰러워 보였다. 사이가 나빴던 남편을 대신해 그는 메리의 호위병처럼 늘 여왕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붙어있었다. 하지만 3번째 결혼은 급기야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했다. 여왕이 혼자 있어야 귀족들이 조종하는 대로 국정이 움직여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여왕의 호위병을 자처하며 갑자기 나타난 헵번이 걸림돌이었다.

여왕은 파멸을 자초하기 시작했다. 결혼한 지 채 한 달도 되지않아 헵번마저 정적들에 의해 추방당했고 결국 감옥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됐다. 세번의 결혼 모두 한 해를 넘기지 못했고, 그 와중에 여러 명의 정부를 둘 정도로 그녀는 정숙치 못하다고 백성들은 여왕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원성은 이미 두 번째 남편 단리가 죽었을 때 극에 달해 있었다.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였다는 표면적인 이유보다는 정작 그녀의 괘씸죄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골프 때문이었다. 남편 단리가 폭발사고로 죽었으나 메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써 웃음짓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슬픔도 없었다.

단리가 죽은 뒤 이틀째 되던 날 태연하게 시종을 불러 골프장으로 나갈 채비를 하라고 일렀던 게 화근이었다. 그날따라 글래스고 골프장은 한가했다. 그날 가볍게 몸을 푼 여왕은 늘 하던대로 서너번 드라이버를 허공에 휘두른 연습 스윙으로 첫번째 홀을 시작했다. 함께 라운드에 나선 시녀들은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여왕의 얼굴이 여느 때와는 달라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메리의 머리속은 오만가지 잡념들로 가득했다. ‘폭발…. 남편의 살해, 사랑했던 정인 로치오의 죽음’ 모든 잡념을 잊기 위해 여왕은 샷에만 열중했다. 다섯 홀이 전부인 코스를 그녀는 2번이나 돌았다. 남편의 3일장도 안 치르고 골프를 치러 나간 여왕의 행동은 국민들을 충분히 분노케 했다.

귀족들에겐 여왕을 하야시킬수 있는 큰 명분이었다. 세번째 남편 헵번마저 처형당한 상황에서 메리 옆엔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 여론을 등에 업은 대신들은 여왕을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여왕은 폐위됐고 인근 작은 섬에 유배되는 죄인의 몸이 됐다. 25살의 한창 나이에 영어의 몸이 된 메리는 악에 받쳤다. 유배 상황에서도 그나마 여왕을 따르는 세력들을 규합해 복권을 시도했지만 사전에 발각이 돼 실패로 돌아갔다.

역모죄로 목숨마저 위태롭게 됐다. 여왕은 갈 곳이 없었다. 도망치는 것 만이 살길이었다. 1568년 겨울의 혹한을 이용해 메리는 어렵게 구한 배를 타고 탈출을 감행했다. 목적지는 잉글랜드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설마 자기를 거절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메리는 사촌 고모인 엘리자베스가 복권까지도 도와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동시대에 각각 한나라씩을 다스리며 오랜 정적 관계이기도 했던 두 사람 간에 밀월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잉글랜드에 도착한 메리를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 안에 가두어 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이전에 메리가 잉글랜드의 여왕까지도 넘보고 있었던 데다, 자신이 잉글랜드의 적통임을 주장할 때 메리가 이를 반대했던 과거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때까지 왕권 확립이 프랑스나 스코틀랜드에는 미치지 못했던 잉글랜드였던 터라 엘리자베스는 늘 양쪽 나라의 침공을 불안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호랑이굴로 찾아온 메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믿었던 엘리자베스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메리는 무려 18년 동안 잉글랜드의 외딴 성 안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죄목은 역시 남편 살해에 대한 연루 때문이었지만 실상은 엘리자베스와의 정적 싸움에서 제거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왕권이 무너질 무렵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의 치세하에 착실하게 국력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선정으로 잉글랜드는 역사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이었다. 어머니 앤 볼렌의 간통죄로 인해 한때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고, ‘블러드 메리 1세’와의 정치 싸움에서 밀려 런던탑에 유폐되는 험난한 시절을 보냈던 엘리지베스였다. 블러드 메리 1세의 죽음 후 25세인 1558년 천신만고 끝에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스코틀랜드의 퀸 메리와는 달리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녀는 도덕적인 평판에는 전혀 흠집이 없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왕으로부터 구혼을 받았으나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했다”면서 거절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대신 그녀는 45년의 재임 기간 동안 치세에만 온 힘을 쏟았다. 잉글랜드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나라’, 그레이트 브리튼의 기초를 만들어 놓은 시기가 이때였다.

정치적 안정에 힘입어 국운은 융성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대문호인 세익스피어의 등장은 그 녀의 치세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1590년경부터 20여년 간 그는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황금같은 희곡들을 발표했다.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에도 세익스피어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첫번째 통합 왕인 제임스 1세의 치세까지 활동하며 영국 문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항상 프랑스로부터 ‘야만스러운 영국놈들’이라는 소리를 듣던 차에 그의 등단은 잉글랜드로서는 가슴벅찬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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