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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속에 감춰진 나…그 진정한 모습은…
엔터테인먼트| 2011-12-29 10:44
피부는 세계와 ‘나’의 물리적인 경계다. 피부의 색과 굴곡, 질감, 모양이 한 사람의 외모를 구성하고, 그것은 한 개인이 갖는 정체성의 출발이 된다. 피부는 나의 일부이자 정체성의 근원이며, 세계와의 경계선이고 내가 살고 있는 ‘외피’다.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내가 사는 피부’(The Skin I live in)는 피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의 복수와 욕망의 우아하고 강렬하며 잔인하고 날카로운 ‘실내악’이다. 완벽한 피부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창조물을 빚어내고자 하는 남자와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외피를 잃어버림으로써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는 여자. 그 둘이 이루는 팽팽한 긴장감이 시종 전율을 일으키는 영화다.

높은 담장과 돌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대저택. 현악이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가 창문을 비치면 벌거벗은 것으로 보이는 한 여인의 실루엣이 움직인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몸은 피부 색깔과 같은 타이즈로 꼭꼭 싸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베라’(엘레나 아나야 분)다.

베라는 최고의 성형외과의 로버트(안토니오 반데라스 분)의 비밀실험 대상이다. 몇 년 전 끔찍한 화상으로 인한 자살로 아내를 잃은 로버트는 완벽한 인공피부를 만들기 위해 베라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조직을 이식해 왔다. 로버트는 노년의 가정부인 마릴리아의 도움을 받아 베라를 수년간 감금시켜 놓고 비밀 시술을 계속해 왔다.

그러던 어느날 로버트가 집을 비운 사이 호랑이 옷으로 가장한 한 사내가 대저택을 찾아와 베라를 범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남자는 하녀 마릴리아의 아들이었다. 이후 완벽하게 유지되던 대저택의 일상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비극적인 과거사와 베라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신 화상으로 괴로워하다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 엄마의 충격적인 죽음을 목격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다 결국 같은 길을 간 딸. 로버트의 비극에 여인 베라는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영화는 기괴한 스토리를 통해 묻는다. 당신의 피부 안에 사는 ‘당신’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영화 속 누구에겐가는 복수이고 원한이며 욕망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성적 정체성이자 자유를 향한 갈구다. 어머니의 아들, 딸의 아빠, 아내의 남편이라고 불리는 그 누구 역시 ‘피부’ 안에 산다. 복선과 반전을 거듭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가 빼어나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내내 영화는 극히 차갑고 건조한 정조를 이어가지만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을 정도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로서의 쾌감도 압도적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를 통해서 보여줬던 알모도바르 감독의 탁월한 영상미와 화면구도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연기는 자신이 잡은 메스만큼이나 냉정하고 단호하며 예리하다. 베라 역의 스페인 배우 엘레나 아나야의 미모와 심리연기도 볼만하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다. 29일 개봉.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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