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헤지펀드와 미술투자는 닮은 꼴?…금융전문가들, 아트마켓 새 강자로 부상
라이프| 2014-03-27 11:40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살벌하기 짝이없는 금융시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거물’급 펀드매니저들이 미술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나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스티브 코헨(58) SAC캐피털 어드바이저스 회장, 존 폴슨(59) 폴슨앤컴퍼니 회장, 켄 그리핀(46) 시타델 회장 등 금융계에서 고도의 전략을 구사해 큰돈을 벌어들인 펀드매니저들은 요즘 글로벌 아트마켓의 ‘큰손’으로 맹활약 중이다.

이에 열기로 휩싸인 뉴욕 및 유럽 미술시장은 근래들어 더욱 거세게 출렁이고 있다. 특히 투자가치가 있는 유명작가의 대표작과 떠오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이들의 투자로 가격이 매년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바스키아, 워홀, 잭슨 폴락, 드 쿠닝, 사이 톰블리,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 거리의 낙서화를 연상케 하는 오스카 뮤릴로(Murillo)의 회화가 추정가의 10배에 달하는 가격(40만달러)에 팔리며 기염을 토하는 게 그 방증이다. 뮤릴로는 ‘제2의 사이 톰블리'로 불리며, 작품을 내놓는 족족 완판되고 있다. 

헤지펀드계 거물인 스티브 코헨이 수집한 윌렘 드 쿠닝의 ‘Woman 3’.

이들 슈퍼리치 펀드매니저들은 금융상품에 비해 미술투자가 정부 규제가 덜 하고, 수익성도 의외로 높은 점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문제는 금융업계 슈퍼 컬렉터들의 작품 보유기간이 날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더비 경매는 ‘평균 2년’이라고 집계했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수집해 최소 5~6년, 길게는 수십년 이상 보유했다가 되파는 기존 수집가들의 ‘점잖고 조심스런 태도’와는 매우 상반된 것이다.

이에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아트마켓이 헤지펀드업계와 닮은꼴이 되고 있다”고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New Masters of the Art Universe’라는 제하의 보도에서 “글로벌 아트마켓이 거물급 펀드매니저들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금융계에서 온갖 기술을 익힌 이 강자(强者)들은 ‘치고 빠지기’ 식으로 미술품에 투자하고 있으며, 작품의 평균 보유기간도 낮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 매거진 또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아티스트를 성장주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가치가 반영되지 않아 차익실현이 가능한 주(株)를 선호하듯, 미술품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다”며 “우위를 점하는 이들에게 그 ‘보상’이 날로 막대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이 시장에선 (금융시장과는 달리) 별반 통제가 이뤄지지 않아 투자자들은 대체로 거리낌이 없다. 비밀 거래와 가격 조작 등의 조짐마저 보인다”고 덧붙였다.
스티브 코헨이 영국 사치갤러리 대표에게 매입한 다미언 허스트의 상어 작품.

대부분 하버드대, 와튼스쿨, 컬럼비아대 등 명문대학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미술작품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자란 이들은 글로벌 아트마켓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되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와튼 출신의 스티브 코헨 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카지노업계 거물인 스티브 윈으로부터 피카소의 걸작 ‘꿈’을 1억5000만달러에 사들인 그는 윌렘 드 쿠닝의 대표작 ‘Woman 3’, 데미안 허스트의 문제작인 ‘해골’과 ‘상어’를 컬렉션했다. 월가 역사상 최대의 내부자거래 혐의로 기소된 그는 사명(社名)을 ‘SAC캐피털’에서 ‘포인트 72’로 바꾸고, 회사와 자신간 거리두기를 꾀하고 있다. 막대한 재판비용을 대기 위해 일부 작품을 매물로 내놓았거나, 팔아치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미술계의 ‘위버 컬렉터’(최고, 최대 수집가)로 불리는 것을 여전히 즐기고 있다는 소식이다. 코헨의 주(主) 활동무대는 이제 최고가 작품이 경매되는 크리스티, 소더비의 ‘이브닝 세일’ 현장이 될듯 하다.

아트마켓의 새 강자로 부상한 대니얼 롭 서드포인트 LLC 회장.

하버드대 MBA 출신의 존 폴슨 폴슨앤컴퍼니 회장은 아트마켓에서 작품값이 계속 치솟고 있는 ‘모빌’의 작가 알렉산더 칼더(1898~1976)의 수채화를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칼더의 수채화가(조각및 회화 등에 비해) 아직 저평가되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약관 20세의 나이에 하버드대 기숙사에 전용선을 설치하고, 자신이 만든 모델로 트레이딩을 시작해 오늘날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 중 하나인 시타델(Citadel)을 이끄는 켄 그리핀은 영화제작자이자 슈퍼 컬렉터인 데이비드 게펜(71)에게 8000만달러를 주고, 미국현대미술계 거장 재스퍼 존스의 회화 ‘False Start’를 매입했다. 그리핀은 직원들에게 ‘미술품 수집도 금융투자처럼 냉철하고, 치밀하게 임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밖에 영국의 헤지펀드 매니저 알란 하워드는 4300만달러를 지불하고, 후기인상파 화가 모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련’을 매입했다.

아트마켓의 새 강자로 부상한 대니얼 롭 서드포인트 LLC 회장.

뉴욕 매거진은 이들 투자자 중 대니얼 롭(52) 서드포인트(Third Point) LLC 회장에 특히 주목했다. 주식시장에서 저평가된 주식을 발굴해 띄우듯, 미술을 투자개념으로 접근하는 대니얼 롭 회장의 최근 동향을 면밀히 분석한 것. 헤지펀드업계에서 고위험을 불사하는 ‘공격형 투자자’로 분류되는 롭은 마크 로스코, 바스키아,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잇달아 매입했다. 롭은 지난해 미술품경매사 소더비 주식도 매입했다.

현재 소더비 지분을 9.3% 보유한 롭은 크리스티에 밀려 수년째 2등에 머물고 있는 소더비를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직원들을 거세게 압박 중이다. 그는 “펄펄 나는 현대미술에 비해 근대미술 파트는 나른함에 빠져 있다”고 질책했으며, 현대미술 부문에서도 소더비가 크리스티를 얼마든지 앞설 수 있다고 채근하고 나섰다. 이제 그는 ‘예술시장의 내부자’가 된 것이다.

수퍼리치들이 주목하는 오스카 뮤릴로(미국)의 회화 ‘무제’. 마치 낙서화같지만 작년 9월 뉴욕 필립스경매에서 추정가의 10배에 달하는 40만1000달러(약 4억3000만원)에 팔렸다.

이에 미국의 언론들은 “대니얼 롭 같은 헤지펀드 ‘수집가’들이 절대 요구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미술품 시장에서의 ‘투명성’이다. 그들은 지금의 불투명한 시장을 즐기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또 지금까지 금융계를 마음껏 주물렀던 시장의 ‘신(神)’들은, 아트마켓 또한 신명나게 주무르길 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최근 빈번해지고 있는 뻔뻔한 투기문화의 근원으로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1973년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벌어진 로버트 앤 에델 스컬(Robert and Ethel Scull) 사건을 꼽고 있다. 진보적인 아티스트로, 자신이 쓰던 낡은 침대보 같은 일상 기물을 릴리프 작업에 활용했던 로버트 라우젠버그(Robert Rauschenberg)는 자신의 작품을 투기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스컬 커플의 행태에 격분하고, 이를 뒤엎으려 했다.

하지만 오늘의 상황은 180도 다르다. 월가의 ‘머니 파워’의 위력이 아트마켓에 발휘되면서 경매사간, 화랑간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비즈니스맨처럼 사고하고,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특히 메이저 경매사간 옥션 경쟁은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는 더이상 예술 그 자체나, 진심어린 컬렉션 문화에서 나오지않는다는 게 문제다. 갈수록 ’자본‘에서 출발하고, 자본이 구심점이 되고 있다.

특히 스티브 코엔이나 대니얼 롭처럼 주주가치에 집착해 ‘부의 창출’을 극대화하려는 헤지펀드 ‘조작가’들 때문에 경쟁은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아트 어드바이저는 “장차 예술시장이 외부의 규제에 굴복하게 된다면, 그것은 고약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글로벌 경제위기를 불러온, 부동산시장에서 벌인 짓같은 행태를 미술시장에서 반복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작금의 현대미술 시장의 문제점을 지적한 ‘시장미술’을 펴낸 미술비평가 심상용 교수(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는 “오늘날 현대미술품의 그 놀라운 가격은 더 이상 미적 가치를 반영하지 않는다. 아티스트의 생산물과 관련된, 재정적 개입의 소산일 뿐이다. 작품의 의미와 가치 보다 ‘값’이 우선하는, 그야말로 시장미술인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싫든좋든 금융시장에서 노련한 경험을 쌓고, 다양한 거래기법(심지어 주가조작)을 익힌 금융전문가들에게 미술시장은 당분간 ‘큰 돈을 벌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매력적인 무대가 될 것이다. ‘무(無) 규제’에 가까운 느슨한 상황도 이들을 더욱 들뜨게 하는 요소다. 노련하고 영민한 펀드매니저들은 아트마켓의 ‘느슨한 규제’를 십분 활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고수들의 경연장’으로 변모한 글로벌 아트마켓의 향후 기상도에 귀추가 모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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