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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광장] 이스라엘의 자기파괴
뉴스종합| 2024-03-08 11:07
벤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AP]

작년 10월 7일 하마스의 충격적 테러 공격으로 촉발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이 4개월을 훌쩍 넘기며 인도적 재앙을 심화시키고 있다. 가자지구 누적 사망자는 3만 명을 넘어섰는데, 이는 가자지구 인구 220만 명의 1.3%에 이르는 숫자다. 희생자 중 대부분은 민간인이고, 하루 평균 10명의 어린이가 다리 절단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연구진의 추계에 따르면 최악의 경우 향후 6개월내에 8만5000여 명이 더 사망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WHO 사무총장의 탄식처럼 가자지구는 “죽음의 지대”로 불릴 정도로 참혹한 상황이다.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전격 침입해 1400여 명을 학살하고, 240여 명을 납치해 가자, 세계 여론은 이스라엘 편에 섰다. 서방을 비롯해 끔찍한 하마스의 테러 행위에 대한 규탄이 잇따랐고 이스라엘의 자위권 행사를 즉각 지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과 지상군 개입이 개시되고 가자지구 민간인 희생이 늘어가자, 세계 여론은 반이스라엘 분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위권 행사라고 하기엔 팔레스타인 희생의 비대칭성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었다. 사망자 숫자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의 20배가 넘는다. 아랍권이 분노하고 있고, 서방은 당혹해하고 있으며, 반유대주의 정서도 거론되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과 가까웠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제소로 이스라엘은 제노사이드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서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이스라엘도 전쟁의 출구를 생각할 만도 한데, 현재까지 네타냐후 정부는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자국민에 잔혹한 테러를 가한 하마스 조직을 차제에 격멸하여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10월 7일의 하마스 공격을 ‘이스라엘판 9.11’로 간주하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겪은 충격과 트라우마는 엄청났으며,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세계 여론으로부터 고립되어 가고 있고, 특히 아랍권의 분노를 촉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안전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20년 이스라엘은 UAE, 바레인 등과 관계를 정상화했고, 최근엔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수교 협상을 진행해 왔다. 이른바 이스라엘-아랍 화해 프로젝트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문제를 환기시키려는 하마스의 노림수로 인해 중동 화해 분위기는 일거에 깨져 버렸고, 이스라엘의 강경 대응이 이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하마스가 놓은 덫에 이스라엘이 알면서도 걸려들고 있는 형국이다. 네타냐후 정부의 강경 대응은 이스라엘의 강력한 우군인 미국마저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 확대, 대규모 공습 반대, 저강도 작전으로의 전환을 이스라엘에 강조해 왔지만, 네타냐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안 그래도 이스라엘에 끌려다닌다는 비판에 시달리는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이스라엘이 전후 가자 지구 관리에 대한 정치적 해법을 거부하고 있다는 데 있다. 네타냐후 정부는 하마스 궤멸만을 강조할 뿐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이며, 전쟁 이후 가자지구를 누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 이유는 연립 정권의 한 축인 극우파가 연정 탈퇴를 무기로 네타냐후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정착촌 확대와 점령 정책을 지속하길 원하며, 네타냐후 역시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중동의 평화는커녕 최소한의 안정화도 요원할 거라는 점이다. 자치권을 박탈당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폭력적 방식으로 분출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기약 없는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동 문제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팔레스타인 문제는 1993년 오슬로협정에서 합의했던 ‘두 국가 해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이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며 땅과 평화를 교환하는 방식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감옥으로 불리는 가자지구를 지금처럼 억압적으로 관리하는 건 극단적 테러리즘의 비옥한 토양이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로켓과 끔찍한 테러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금번 사태야말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없이 중동 평화는 무망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망은 극히 어둡다.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극우적 연립 정권이 장악한 상황이다. 한때 희망을 제시했던 평화 진영(peace camp)은 양쪽에서 모두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우리는 피를 흘릴 만큼 흘렸다” 오슬로협정에 서명한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했던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극우 청년의 총탄으로 쓰러졌고, 중동의 평화는 멀어지고 말았다. 무고한 팔레스타인의 희생이 계속되고, 이스라엘의 안보도 뒷걸음치고 있는 암울한 상황이다.

과연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에 라빈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답답할 뿐이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

zzz@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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