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86년 전 서울 '오므라이스 맛집' 아시나요 [채상우의 미담:味談]
뉴스종합| 2023-03-1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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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정상회담 뒤 2차로 만찬을 한 도쿄 긴자의 경양식집인 렌가테이. 로이터=연합뉴스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일본에 128년 된 오므라이스집이 있다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도쿄 정상회담' 이후 만찬을 위해 찾은 경양식집 '렌가테이'(煉瓦亭)가 주목받고 있다. 도쿄 번화가 긴자에 위치한 이곳은 일본식 오므라이스 발상지로 유명하다.

렌테가이에 관심이 집중된 이유 중 하나는 '128년'이라는 업력이다. '100여년 전통의 오므라이스 가게', 일본에서 128년 된 가게는 오래된 축에도 끼지 못한다. 1000년을 넘게 이어온 가게도 적지 않다.

1937년 카페 '명월관'의 모습. 당시 경성 일대의 카페에서는 일본에서 들어온 '오므라이스'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28년까지는 아니지만 86년 전 서울에도 일본에서 들어온 오므라이스를 팔던 집이 있었다. 심지어 한 청년이 죽기 전 마지막 식사로 찾았을 만큼 '맛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노포(老鋪)가 사라진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1937년 경성, 오므라이스를 팔던 식당을 당시 신문기사 등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1937년 죽으려던 청년의 마지막 만찬, '희대지(喜代志)' 오므라이스
1937년 7월 2일 동아일보 기사.(빨간 표시로 된 기사).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청년이 마지막 식사로 충정로에 위치한 카페 '희대지'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었다는 내용이다.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여기, 옴-라이쓰(오므라이스)로 주시오."

1937년 초여름의 어느날. 죽첨정(竹添町) 2정목 26번지(현재 충정로 1가 36번지)에 위치한 카페 '희대지'(喜代志). 손을 살짝 올려 종업원을 부른 태원이 제법 정중한 어투로 메뉴를 말했다.

1930년대 경성의 한 식당 풍경. [스마트K]

'죽으려던 청년이 칼모친(자살용으로 많이 사용되던 수면제의 일종)을 마신후 먹은 마지막 만찬이 바로 이 옴-라이쓰란 말이지.'

얼마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청년이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었다는 기사를 접한 뒤 태완은 그 맛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얼마 전 스스로 죽으려한 청년이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었다는 신문 기사를 본 뒤 그 맛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동경(東京)에서나 맛볼 수 있다던 그 오므라이스가 최근들어 '낙원회관'이라든지, '엔젤', '평화', 목단 등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이 찾는 카페를 중심으로 유행하는 모양이었다. '모던보이' 태원이 빠질 수 있으랴.

일본 도쿄의 128년 전통 경양식집 '렌가테이'의 오므라이스. [리브인도쿄]

"오므라이스 나왔습니다."

샛노란 계란부침 위에 케첩이 뿌려진 오므라이스는 태완이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이전에 양식집에서 먹어본 적 있던, '카레라이스'나 '하야시라이스' 같은 부류를 생각했던 그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숟가락으로 푹 찍어내자 모락모락 김을 내는 분홍빛 볶음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태(貴態)마저 느껴졌다. 입에 넣자 버터와 후추, 케첩이 어우러진 감칠맛이 혀를 휘감았다. 계란부침의 고소함이 자칫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시큼한 케첩의 맛을 다독이듯 감쌌다.

'1원(현재 가치로 약 5만원)이라는 비싼 값이 전혀 아깝지 않군.' 오므라이스 한 그릇을 싹 비운 태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1997년 서울의 거리.

60년이 지난 1997년. 80대의 노인이 된 태완은 서대문역 근처에 볼 일을 보러 나왔다가, 문득 그때 먹었던 오므라이스 생각에 잠겼다. 희대지가 있던 주변에는 호프집과 고깃집이 잔뜩 들어서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기 어려웠다.

'아쉽구만. 꼭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젊은 시절의 추억이 사라진 자리에서 태완은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재화를 탐하지 마라"…상업 천대한 조선, 100년 가게 명맥 끊은 근원
조선 말기 시장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재화는 인간의 마음을 욕망으로 채운다. 재화가 몰리는 시장(市場)은 욕망이 들끓고 이익을 다투는 곳이니, 상업은 세상 모든 근간 중 가장 아래의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한식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2023년 현재 한국에 100년 된 음식점은 전국에 7개뿐이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5곳이었지만, 1924년 문을 연 울산의 '함양집'과 해남의 '천일식당'이 올해 포함됐다.

가장 오래된 곳은 서울 종로구에 '이문설농탕'으로 1904년 문을 열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에 100년 식당은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에 오래된 식당이 없는 대표적인 이유는 조선시대 직업에 따른 사회계급,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꼽힌다. 상업을 천대했던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이다.

조선왕조와 사대부들은 재화를 탐내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한양 운종가에 '육의전'(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은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을 두고 상업을 철저히 통제했다. 상업을 천대시하는 사회 구조는 화폐경제의 실패로 돌아갔다. 서양에서 금융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에도 조선은 물물교환이 주거래 시스템이었다.

조선 말기 주막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드는 자급자족에 매달렸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주막 등에서 식사를 하는 건 일반 백성들에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요식업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보는 '식당'은 조선에서 쉽게 볼 수 없었다.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서구화와 함께 한국에도 서울을 중심으로 각종 음식점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재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한국전쟁으로 생업을 잇기가 어려웠고, 이후 빠르게 진행된 산업화에 따른 도시 재개발로 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역사와 전통을 등한시한 정부와 사회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일본, 100년 넘은 기업만 3만3000개…'장인정신'·'상업중시'가 주도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토의 떡집 '이치몬지야와스케'(一文字屋和助).

"100년이 안 된 식당은 아직 맛을 완성하지 못했다."

반면 일본에는 100년 이상 된 장수기업이 약 3만3000개에 달한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떡집 '이치몬지야와스케'(一文字屋和助), 600년 된 메밀소바 '오와리야'(尾張屋), 400년 된 초밥집 '이요마타'(伊豫又) 등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한 가게들이 수두룩하다.

에도시대 옷을 만드는 공장의 모습을 그린 민화. 당시 발달했던 일본의 상업을 잘 보여준다.

이에 대해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상업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와 특유의 장인정신이 이를 가능케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중요한 건 상업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일본에도 사농공상이란 개념이 있었지만, 상업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상인들은 돈을 벌면, 사회에 환원하고 주변에 다리를 지어준다든가 공익적인 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백성들은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을 존경하고 따랐고 자연스럽게 상인들은 부와 명예를 얻게 됐습니다. 돈이 많은 상인의 자식들은 이런 부와 명예를 당연히 이어받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사회적 성공에 대한 열망이 세습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단순히 세습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원하는 맛과 품질을 충족하지 않으면 연명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 '모노츠쿠리(物作り)'가 작동한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 사람들은 오래된 것을 지키는 장인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상인들은 손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계속해 품질을 높이려 노력을 하죠. 이게 일본의 장인정신입니다. 이런 선순환이 오래된 가게를 잇게 하는 동력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노포' 줄줄이 폐업…부랴부랴 숫자만 채우는 정부
37년 동안 을지로에서 영업을 한 냉면집 '을지면옥'이 지난해 6월 폐업했다. [연합]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떨까. 노포의 가치를 생각할 겨를 없었던 '격동의 산업화 시기'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난해 6월, 37년간 을지로를 지켜온 터줏대감 '을지면옥'이 폐업했다. 같은해 1월에는 72년을 이어온 동작구 중식당 '대성관'이 문을 닫았다. 60년 전통의 서대문구 '통술집', 동대문구 '동화반점', 중구 '을지오비(OB)베어' 등 유명한 노포도 줄줄이 폐업했다.

이들이 문을 닫는 이유는 ▷코로나19로 인한 매출 타격 ▷도심 정비 ▷전·월세 급증 등이 꼽힌다. 노포를 운영하는 주인 대부분이 노년층이 많다 보니,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고 시설이나 매장 분위기가 노후화된 것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노포 특유의 낡은 느낌을 좋아하는 오래된 손님도 있지만, 젊고 새로운 고객 유입에는 실패하는 것이다.

100년 식당에 대한 국민들의 바람이 커지자, 2018년 정부는 부랴부랴 한국에서도 '백년가게'를 육성하겠다고 나섰다. 백년가게는 정부가 일본처럼 100년 이상 가는 상점을 만들어보겠다며 추진한 프로젝트다. 2018년 72개로 시작해 현재는 1346개로 늘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보여주기식 숫자 늘리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백년가게로 선정되면 ▷컨설팅 ▷혁신역량 교육 ▷홍보 ▷지원 사업 우대 ▷금융지원 등을 한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백년가게에 선정된 업주들은 "현실은 교보재를 나눠주고 백년가게 현판과 스티커를 부착해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지원은 없다"고 했다. 그나마 지역신용보증재단에서 보증비율 100%, 보증료율 0.8% 고정 및 소상공인경영안정자금 금리 우대 0.4%p 인하 등의 혜택을 주는 금융지원이 있지만, 이마저도 위기 상황에서는 큰 힘이 되기 어렵다는 게 업주들의 입장이다.

뿐만 아니라 백년가게에 선정되고 나서 얼마 안 가 문을 닫은 곳들도 있다. 처음 선정된 72개 백년가게 중 9곳이 문을 닫았다. 지난해 문을 닫은 '을지OB베어'도 백년가게로 선정된 곳이었다. 강호신(63) 을지OB베어 사장은 문을 닫기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백년가게와 서울미래유산 현판이 당당히 걸려있지만, 100년과 유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임대 문제로 내쫓길 상황"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선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정부가 숫자 불리기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중기부 관계자는 "'정량평가'와 '현장평가' 그리고 내외부위원 평가에 따라 선정한다"며 "내외부위원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히기 어렵고, 자영업자 전문가 정도로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구체적인 선정 과정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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