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홍성원의 영점조정]집값, 진보·보수 이념 굴레서 구출해야
뉴스종합| 2023-03-29 11:31
금융 에디터

우편함에서 한 캐피털사가 쑤셔 넣은 주택담보대출 홍보 전단을 꺼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한 달 전께엔 집값을 이전보다 9%가량 낮게 잡아 대출해주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번엔 더 떨어뜨리지 않았다. 최근 주요 지역 주택 가격의 하락 폭이 줄었다든가, 바닥을 다지고 있다는 식의 분석이 내 처지까지 꿰고 있는 느낌이었다.

속물적 근성도 꿈틀댔다. ‘저런 시세평가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불평이다. 20여년 전 기자 초년병 때엔 서울 올림픽대로를 타고 이동하면서 한강 이쪽저쪽 어느 곳에도 내 집 하나 없다는 점에 허탈했다. ‘이번 생(生)엔 불가’라는 자체 예측에 우울했던 과거가 이젠 상대적 박탈감으로 변화했다.

남도 다르지 않다. 금리가 지난해 무섭게 오른 탓에 집값이 급락했는데, 아직 멀었다고 아우성친다. 집값뿐만 아니라 건설로 먹고사는 쪽과 돈을 대주는 금융회사까지 흔들리는 걸 의미하는 주택시장 경착륙이 현실화하면 경제가 그야말로 ‘골’로 가는데, 임계(臨界)엔 관심 없고 더 빠지길 바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국내 인구 5000여만명 가운데 주택을 소유한 개인이 1508만9000명이니, 나머지가 내 집 장만을 위해 비정상적인 현재 집값 수준은 더 낮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일리가 있다. 2017년 2분기엔 가계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PIR)이 서울은 8.8배 수준이었는데, 작년 2분기 14.8배로 최고치를 찍었다. 같은 해 4분기엔 13.4배로 약간 빠졌다. 1년 동안 버는 돈보다 13~14배 비싼 집을 꾸역꾸역 빚을 내 구매해 살고 있다. 빚에 허덕이면 늘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어서 행복할 리 없다.

정상적인 욕구가 탐욕으로 덧대지고 금수저든 투기꾼이든 가진 자에 대한 질시(疾視)가 뒤섞인 주택시장은 중간이 확 비어버렸다. 그래서 빈부격차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3.3㎡당 1억원이 넘는 아파트 단지가 국내에 11곳(KB국민은행 선정 선도아파트 기준·2월 현재)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서초구 반포·잠원동, 용산구 이촌동에 몰려 있다. 2개 단지를 빼곤 모두 지은 지 40~50년 차다. 재건축을 염두에 두고 분출한 시세는 앞으로 더 뻗어나갈 공산이 크다. 3.3㎡당 9000만원을 웃도는 아파트도 20여 곳이다. 교통·교육환경 같은 입지가 관건인 부동산 시장이라지만 부의 양극화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진짜 금(金)이 아닌 금처럼 보이도록 포장을 한 ‘도금시대(Gilded Age)’라고 1800년대 중후반기 자국의 세태를 꼬집은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살아 있다면 한국은 괄목할 만하다.

올라도 문제, 내려도 걱정인 집값엔 글로벌 경제상황·금리·유동성 등이 얽히고설켜 있다. 정부도 시류에 따라 규제를 조이고 풀었다. 그러나 주택정책 관련 최상위법이라는 주거기본법에 적힌 ‘소득수준·생애주기 등에 따른 주택공급 및 주거비 지원을 통해 국민의 주거비가 부담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도록 할 것’이라는 원칙을 실현했는지에 대해선 역대 어느 정부에도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다.

정권 입맛·상황 따라 규제카드 돌려막기

김대중 정부(1998~2003년)부터 현재까지 25년 동안 정부는 주택시장을 두고 ‘가격안정·투기억제’와 ‘서민주거 복지’를 양대 축 삼아 정책 목표를 바꿔왔다. 보수·진보의 이념 성향이 녹아든 측면도 있지만 그때그때 시장 상황을 뒷수습하기 위한 수단을 썼다. 보수정권은 집값 안정화에 성공했고, 진보정권은 주택가격 폭등의 원흉이라는 도식은 ‘반(半)은 맞고 반은 틀린’ 선입견이란 얘기다. 글로벌 경제 사이클, 앞선 정권이 펼친 경제·주택정책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한 긴급처방이었을 뿐 특출난 정책 메커니즘은 없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대통령이 7차례 바뀔 동안 ‘주택가격 급등 시기’로 전문가가 꼽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쉴 새 없이 시장 안정책을 내놓았다. 전임 김대중(DJ)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경기 진작을 위해 규제를 대폭 완화한 업보(業報)를 후임 진보정권이 짊어진 셈이었다. DJ로서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국면을 극복하려면 규제를 풀어야 했다. 이는 훗날 정권 말기 집값 상승 엔진에 불을 붙였다. 버티기 힘들었던 노무현 정부는 2006년 김포·파주·판교 등에 2기 신도시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수요억제만으론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대규모 주택공급 카드다.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강력한 부동산 규제 정책을 썼다는 평가를 받는 보수진영의 노태우 전 대통령 때 1기 신도시의 복사판이다.

보수 깃발을 단 이명박(MB)·박근혜 정부는 규제완화를 기조로 집값을 부양하는 데 집중했다. MB는 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촉발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에 덮치는 걸 막으려고 노무현 정부에서 틀어쥐었던 부동산 규제정책을 단계적으로 풀었다. 지방 미분양 해소 대책을 시작으로 강남3구도 투기지역에서 해제했다. 박근혜 정부도 조세·금리·청약거래 등에 혜택을 주며 부동산 경기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16년 서울 등 일부에서 집값 급등 현상이 나타났다. 보수 정권인데 규제 강화로 방향을 틀었다. 투기수요 차단을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조정대상지역은 박근혜 정권 끝자락인 2006년 11·3대책에 처음 등장했다.

문재인 정부는 초기 ‘집값을 잡으면 피자를 쏘겠다’고 공무원을 독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앞선 정부에서 너무 많이 푼 규제를 조이며 ‘투기와 전쟁’을 벌였고, 2018년 9·21대책으로 3기 신도시 계획도 내놓았지만 효과는 더뎠다. 살고 싶은 지역에 집을 갖겠다는 인간 심리를 살피기보단 다주택자는 적(適)이라는 관점에 매몰돼 숲을 보지 못했다. 다주택자를 걸러내려고 재건축단지 실거주 요건을 강화해 집주인이 임차인을 내보내도록 하면서 전세 세입자에겐 계약갱신청구권을 보장하는 아귀가 맞지 않는 정책이 대표적이다.

운수 좋은 尹 정부?...옳은 방향성·급진적 피벗은 걱정

전문가 10명에게 물었더니 3명이 윤석열 정부는 부동산에 관한 한 운이 좋다고 했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원성을 사는 것보단 떨어지는 게 정권 입장에선 여론 방어에 쉽다는 것이다. 전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코로나19로 인한 유동성 파티·‘인플레이션(물가상승)과 전쟁’을 목적으로 한 미국발(發) 기준금리 인상의 복합적 환경에서 현 정부는 최고점에 달한 집값이 급전직하할 때 조타수 역할을 맡았다. 과도하게 올랐던 만큼 조정은 당연한데, 미 연방준비제도가 휘두르는 ‘금리인상 칼날’에 한국 주택시장은 경착륙을 걱정해야 하는 판이 깔렸다.

현 정부는 재건축을 중심으로 수요가 있는 지역에 주택 공급량을 확보하려고 규제 완화 카드를 택했다. 시장 안정화와 경착륙 방어를 위한 명쾌한 움직임이었다. 누가 정권을 잡았더라도 그런 방법밖에 없었을 테지만, ‘시장친화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주택·건설시장을 흔들 뇌관으로 지목되는 미분양주택 문제도 현 정부는 건설사의 분양가 인하가 먼저라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MB처럼 미분양주택 구입 때 5년간 양도세 감면·취득세 감면과 같은 안을 검토할 수 있다.

어쨌든 감세 등 부자를 위한 정책만 편다고 비판할 때가 아니라 시장을 살리려는 방향성은 맞는다는 진단이다. 문제는 하락기엔 규제완화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규제가 풀려 집값 내림폭이 줄었다는 소식이 나오곤 있지만 기준금리의 향방이 여전히 오리무중이어서 판세 예측이 버겁다. 미 실리콘밸리은행(SVB)·스위스 전통 투자은행(IB)인 크레디트스위스(CS)가 무너질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글로벌 경제 상황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규제를 풀어도 약발이 확연하진 않은데, 2~3년 뒤 시장이 턴어라운드할 시점엔 규제완화를 위한 급격한 피벗(정책 방향 전환) 때문에 부작용이 불거질 수 있다. 박근혜 정부 말기, 오르는 집값을 잡으려고 조정대상지역 처방을 냈던 것처럼 기조를 바꿔야 할 수 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정책의 스펙트럼이 요동치며 순환하는 자체도 한국적 상황에선 예상 가능한 지점이라고 자위하기엔 ‘신뢰의 축적’ 수준이 하찮다.

풀지 못하는 과제들

주택정책엔 관치(官治)가 통한 적이 없다. 시장을 뒤늦게 따라가기 바빴고, 배척한 측은 정권 연장에 실패했다. 규제에 의존해 시장변동성을 줄여 나가는 방식이 진보든 보수든 너무 급진적이었다. 주택가격 동향·거래량과 같이 미시적인 사안에 집착해 관리하려고 한 결과다. 세계 어느 나라도 정권에 따라, 집값 등락에 따라 10여차례 이상 대책을 내놓는 사례는 없다.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도입된 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을 계기로 ‘집은 구매(buy)하는 게 아닌 사는(live) 것’이라는 쪽으로 패러다임 시프트가 이뤄질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아직 바뀌지 않고 있다고 한 전문가는 통찰했다. 돈이 넘쳐나는 사람의 주택과 경제적 능력이 미약한 이들의 집을 한 바구니에 담고 정책을 구사한 패턴을 이젠 바꿔야 한다.

집이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준거가 되는 건 받아들이기 꺼려지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인식이 변해야 하는 지난(至難)한 일이지만, 시장 침체기인 지금이 되레 기회일 수 있다.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은 누구나 들어가 살고 싶어 하는 땅이어서 그런 딱지를 붙였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투자 수요가 투기 욕심으로 매도당하지 않게 미세조정할 필요가 있다.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주거복지 차원의 공공임대 주택엔 수지타산을 맞춰야 한다는 불합리를 내걸지 않아야 한다. 서민주거 안정을 미션으로 삼았으면서도 주거비 부담을 더 늘린 진보 측은 특히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를 학습해야 한다. 집이 있으면 있는 대로 괴롭고, 없으면 없는 대로 속 끓는 상태를 만들어선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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