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편 123. 조지 워싱턴]
①보스턴 차 사건 美독립전쟁 발화
②렉싱턴-콩코드 전투서 뜻밖 성과
그런뒤 최강 영국군 앞서 추풍낙엽
워싱턴 ③트렌턴 전투로 극적 반전
④새러토가 전투서 승리 쐐기 박고
⑤요크 타운 전투로 확실하게 제압
에마누엘 로이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일부 확대), 1851, 캔버스에 유채, 378.5x647.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꼭 이겨야 한다. 이번에도 지면…. 모든 게 끝이다.
1776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당일 밤. 미국 대륙군(북미 13곳 영국 식민지군)의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혼잣말을 했다. 그는 2400여명 병사와 배에 올라 델라웨어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강기슭에 있는 트렌턴이었다. 영국군 소속의 독일 용병단이 있는 그 도시를 몰래 칠 생각이었다.
사실 이는 무모한 행보였다. 가망 없는 승부수였다.
지난해부터 미국 대륙군은 영국군과 북미 땅에서 싸우고 있었다. 영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대륙군의 기세도 좋았지만, 극초반 직후부터는 영국군에 연전연패했다. 대륙군 총사령관인 워싱턴은 전쟁을 총괄 지휘한 경험이 없었다. 대륙군 병사 또한 농민 등으로 이뤄진 잡군일 뿐이었다. 반면 영국군은 그 시절 최강으로 불릴 만큼 위력적이었다. 이러니 짧았던 초심자의 행운 후 치이고, 물러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워싱턴과 대륙군 1만명가량이 롱아일랜드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3만 대군의 영국군은 눈 깜짝할 새 롱아일랜드에서 뉴욕 땅은 물론, 그 주변부까지 손에 넣었다. 정신 차려보니 대륙군은 1년 새 펜실베이니아까지 밀려나있었다. 대륙군은 붕괴 위기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대륙군 중 대부분은 곧 '합법'적으로 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들의 전역 날짜는 1776년 12월31일이었다. 어느덧 코 앞이었다. 밥 먹듯 도망치는 대륙군을 위해 복무 연장을 할 이는 없을 터였다.
조지 케일럽 빙햄,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 1856~1871, 캔버스에 유채, 93x146.1cm, 크라이슬러 미술관 |
…그래도, 딱 한 번만 보란 듯 승리하면 분위기가 바뀔 것이다.
워싱턴은 이런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의 복무 기한을 엿새 남긴 이날, 델라웨어강을 건너 트렌턴을 급습하기로 한 것이었다. 승리, 오직 딱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런데, 대륙군은 영국군에게 정말 한 번도 안 들킬 수 있을까.
불가능해보였다. 이 무렵 트렌턴 주변 영국 편의 독일 용병단은 정찰에 힘을 쏟았다. 날씨도 좋지 않았다. 강 절반쯤은 이미 얼어있었다. 기습은커녕 얼음 조각에 갇히기 딱 좋았다. 즉, 워싱턴과 그의 병사는 사실상 죽으러 가는 셈이었다. 실제로 그가 셋으로 나눈 부대 중 두 곳은 도강(渡江)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처럼 절망적인 순간, 온 우주가 대륙군 편에 서기로 결심한 듯 행운이 이어졌다. 열심히 주위를 살피던 독일 용병단은 그날 밤, 우연히 다른 민병대와 마주쳐 교전을 벌였다. 용병단은 이를 대륙군의 마지막 발악으로 착각했다. 용병단은 날이 밝자마자 또 주변을 둘러보긴 했다. 역시나 보이는 게 없었다.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이 와중에 워싱턴 부대가 건너는 강줄기는 그나마 얼음도 얇았다. 이 덕에 들키지도, 갇히지도 않은 채 나아갈 수 있었다.
존 트럼불, 1776년, 12월 26일. 트렌턴에서 헤센(독일 용병)군의 포획, 1786~1828, 캔버스에 유채, 51.5x76.2cm, 예일 대학교 미술관 |
왜 이렇게 조용해…?
워싱턴은 의아했다. 그는 행운을 흠뻑 뒤집어썼다는 걸 모른 채 트렌턴 땅을 무사히 밟았다. 대포를 가득 끌고서 천천히 나아갔다. 사실 워싱턴과 대륙군이 용병단의 마지막 정찰에까지 걸리지 않은 건 이 덕이었다. 대포가 너무 무거워 진군이 늦어진 탓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26일 오전 8시께. 워싱턴은 그도 당황스러울 만큼 트렌턴의 핵심 언덕을 쉽게 장악했다. 대륙군은 그곳에 대포를 촘촘히 깔았다. 영국군과 용병단 입장에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대륙군은 이날 포로만 900여명을 붙잡았다. 기적 같은 일에 사기가 오른 대륙군은 인근 프린스턴에서 또 승리했다. 매번 지던 잡군이 전투 베테랑을 연거푸 압살한, 세계사 통틀어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워싱턴 입장에선 값진 결과였다. 승리의 달콤함을 느낀 대륙군 대부분은 전역을 늦췄다. 그렇게 미국 독립 전쟁의 흐름도 바뀌기 시작했다.
에마누엘 로이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 1851, 캔버스에 유채, 378.5x647.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에마누엘 로이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일부 확대), 1851, 캔버스에 유채, 378.5x647.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엠마누엘 로이체가 트렌턴 전투에 임하는 워싱턴의 결정적 순간을 화폭에 옮겼다.
워싱턴이 한 쪽 다리를 내민 채 점잖게 섰다. 그런데, 그의 이 자태와 주변 모습은 영 어울리질 않는다. 뗏목처럼 작은 배, 통일성 없이 제각각인 병사…. 이들은 전투는커녕 노 젓기와 얼음 깨기에 힘을 다 쓸 것처럼 보인다. 당시 대륙군의 상황이 쉽지 않고, 병사 또한 오합지졸이라는 걸 표현한 듯하다.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 이들은 밝은 곳으로 간다. 먹구름 틈으로도 드디어 빛이 새어나온다. 행운은 끝까지 이들 편에 서줬을까.
보스턴 차 사건, 1789 |
원래 영국과 북미 동부의 13곳 식민지 사이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영국이 긴 전쟁 여파로 돈이 궁해지기 전까지는.
살찌운 대륙을 드디어 써먹을 때가 왔구나. 돈줄이 마른 영국 정부는 차츰 이런 마음으로 북미 식민지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껏 봐주고 있었다는 양 점점 노골적으로 세금을 뜯었다.
가령 1764년, 영국은 이들에게 설탕세를 씌웠다.
다음 해에는 인지세를 도입해 책과 신문, 심지어 트럼프 카드에도 세금을 매겼다. 식민지 주민의 제철업 투자를 제한하는 제철법, 식민지 내 지폐 발행을 금지하는 화폐법 등도 마구잡이로 만들었다. 식민지 주민은 부글부글 끓었다.
미국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은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발발했다.
1773년. 이제는 영국의 공기업 격인 동인도 회사마저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북미 식민지에 대한 차(茶) 판매권을 동인도 회사에 독점으로 줬다. 일종의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이번 조치로 동인도 회사 소속 아닌 상인은 더는 차를 수입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북미 식민지 주민(특히나 자존심 센 지식인과 손해를 본 상인)은 이를 영국의 도 넘는 간섭으로 봤다. 세금을 쥐어짜고 시장을 교란하는 데 이어, 단순 기호품을 놓고도 일일이 참견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었다.
너대니얼 커리어, 보스턴 차 사건, 1846, 석판화, 스프링필드 미술관 |
그 해 12월16일. 차를 가득 실은 영국 배 3척이 보스턴 항에 들어왔다. 성난 군중은 아메리칸 인디언 분장을 한 채 항구를 습격했다. 배에 올라탄 이들은 궤짝을 마구잡이로 내던졌다. 이 일로 약 1만 파운드의 차가 버려졌다. 너대니얼 커리어가 그림 〈보스턴 차 사건〉을 통해 당시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변장을 하고 웃통까지 벗은 한 무리가 배에 올랐다. 차가 담긴 상자를 한풀이하듯 내버린다. 식민지 주민은 이 모습에 손을 들어 환호한다. 현장에선 "차라리 보스턴 항을 찻주전자로 만들자!"라는 식의 구호가 퍼졌다. 영국 시선에선 테러, 북미 식민지 입장에선 혁명의 시작이었다.
"식민지 놈들이 내다버린 차를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한다."
영국은 영국대로 격노해 이런 식으로 맞받았다. 보복도 했다. 이제는 영국 정부의 허락이 없으면 식민지 주민은 모임도 열 수 없었다. 영국군이 원하면 무슨 건물이든 개방해야하는 숙영법도 강요했다.
"자유를 원하면 싸워야 합니다."
1775년. 식민지 독립론자였던 패트릭 헨리가 리치먼드 민중 대회에서 입을 열었다. "제 입장은…. 자유를 달라. 그게 아니라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이것입니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더욱 조여드는 탄압에 분노하고만 있던 시민은 이 밀도 높은 말에 환호했다.
비슷한 시기, 자유주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책 《상식》을 출간했다.
"섬이 대륙을 영구 통치하는 건 불합리한 일이다. (…) 위성이 행성보다 큰 사례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상식' 아닌가. 페인은 책을 통해 식민지 주민에게 물었다. 주민은 또 한 번 열광했다. 이제 독립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데 이견을 달 이는 없었다. 전쟁은 물릴 수 없는 선택이 됐다.
윌리엄 반스 울렌, 렉싱턴 전투, 1910, 캔버스에 유채 |
그 무렵 이미 영국군과 미국 대륙군(정확히는 당시로는 민병대) 사이 소규모 전투가 이뤄지고 있었다.
초반에는 대륙군이 활약했다. 1775년, 4월. 보스턴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한 첩보를 입수했다. 보스턴 인근 콩코드의 대륙군이 몰래 무기를 모으고 있다는 정보였다. 정예 영국군 700여명이 출격했다. 초장부터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생각이었다. 진군하던 영국군은 콩코드 근처 렉싱턴에서 대륙군 일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나란히 선 채 대치했다. 짙은 안개만이 그사이를 낭창하게 유영했다.
"건방진 폭도들이여, 알아서 해산하라!"
침묵을 깬 건 영국군이었다. 탕. 이때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다. 훗날 '전 세계에 울려 퍼진 총성(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으로 칭해지는 이 소리 직후 양군은 맞붙었다.
프랑수아 고드프로이, 렉싱턴 전투, 1775~1819년경 |
영국군은 능숙했고, 대륙군은 처절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본 영국군은 곧장 콩코드까지 밀어붙였다. 영국군은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걸 짓이겼다.
할 일을 끝냈다고 본 영국군은 보스턴으로 회군했다. 위기는 그때부터 찾아왔다. 대륙군은 영국군이 다리를 건널 때, 구릉을 넘을 때, 절벽을 지날 때만 되면 불쑥 모습을 보였다. 더 무서운 건, 대륙군의 숫자는 점점 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영국군이 때려 부순 집과 농장 구성원이 대륙군에 합류한 결과였다. 영국군은 야금야금 뜯어먹혔다. 영국군은 이번 렉싱턴-콩코드 전투 중 250명 이상 사상자를 냈다. 반면 대륙군 사상자는 90~95명 수준이었다.
13곳 식민지 대표는 이쯤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76년, 3월. 워싱턴의 대륙군은 여세를 몰아 영국군이 머물러있던 보스턴까지 덮쳤다. 대륙군은 함대에 올라 철수하는 영국군을 조롱했다. 하지만 대륙군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영국군의 시간이었다.
알론조 샤펠, 롱아일랜드 전투, 1858 |
영국군은 곧장 3만 대군을 되돌아와 뉴욕을 쳤다.
보스턴 철수 뒤 반년도 흐르지 않은 때였다. 윌리엄 하우 장군이 이끈 영국군은 뉴욕 남동쪽 롱아일랜드에 상륙했다. 대륙군은 나름대로 진을 치고 있었지만, 군의 질과 양 모두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영국군은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압승을 거뒀다. 영국군 사상자는 400명 안팎, 대륙군 사상자는 5배 격인 2000명 안팎이었다.
대륙군은 계속 깨졌다.
렉싱턴-콩코드 전투 같은 짜릿한 승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듯했다. 대륙군은 킵스베이, 화이트 플레인스, 워싱턴 하이츠에서 연거푸 패배했다. 요새 격으로 둔 포트 워싱턴과 포트 리까지 빼앗겼다. 민병대 티를 벗지 못한 대륙군은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할 뿐이었다. 보스턴 탈환 당시 휘파람을 불던 대륙군은 이제 땅바닥만 보고 행군했다. 병사 1만여명 중 몇천이 죽거나 도망쳤다. 남은 이들 중에서도 소총을 가진 이는 3분의 1 수준이었다.
"인간 한계를 뛰어넘은 고난을 겪어야 했던 극소수의 사람들…."
훗날 워싱턴은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다.
존 트럼불, 조지 워싱턴, 1780, 캔버스에 유채, 91.4x71.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이런 가운데, 워싱턴이 식민지의 명운을 걸고 트렌턴 전투에 나선 것이었다.
그가 여기서 기적처럼 승리하지 못했다면 대륙군은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의 향후 몇백년 또한 요동칠 수 있었다. 독립 전쟁 당시 대륙군 편에서 군복무를 한 존 트럼불이 트렌턴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의 워싱턴 모습을 그렸다. 워싱턴은 승장의 여유로움을 한껏 내보인다. 파란색 코트를 두른 워싱턴은 왼손에는 검, 오른손에는 망원경을 든 채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저 멀리서는 트렌턴 전투의 일등 공신인 포병 군단을 볼 수 있다. 말은 마부의 제지를 받아야 할 만큼 아직도 기운이 넘친다. 하지만 워싱턴도 천막에 들어가선 널브러진 채 가슴을 쓸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퍼시 모란, 새러토가 전투에서 버고인 장군의 항복, 1911 |
트렌턴 전투가 미국 독립의 불씨를 살렸다.
새러토가 전투는 그 불씨를 거대한 불줄기로 키운 사건이었다. 트렌턴 전투 직후인 1777년 봄. 영국 정부도 작전을 짰다. 뉴욕을 빼앗은 정규군, 캐나다에 주둔하는 군을 연계해 대륙군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뉴욕의 하우 장군이 필라델피아, 캐나다 방면의 존 버고인 장군이 허드슨강 유역 전체를 점령하는 구상이었다. 그렇게 하면 대륙군의 심장과 대동맥을 모두 뜯어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존 트럼불, 버고인 장군의 항복, 1821, 캔버스에 유채, 365.7x548.6cm, 미국 국회의사당 |
하우는 필라델피아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1만여명 병사와 함께 나선 버고인은 그러지 못했다. 오판 끝에 세러토가 일대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버고인의 영국군은 대륙군과 인근 민병대의 게릴라전에 미칠 노릇이었다. 어느새 가을이 무르익은 10월. 버고인과 6000여명 병사는 대륙군에 항복했다. 존 트럼불이 그 장면도 화폭에 옮겨 담았다. 빨간색 영국 군복을 입은 버고인과 또 다른 장교 윌리엄 필립스가 어정쩡하게 섰다. 이들은 당시 대륙군의 장군 호레이쇼 게이츠에게 검을 넘겨준다. 완벽한 굴복 표시였다. 최고 전력을 자랑하는 군이 식민지 군과 민병대 앞에서 무기를 포기하고 무릎 꿇었다는 것. 이건 국제적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장 영국의 앙숙 프랑스가 대륙군을 달리 봤다.
스페인, 네덜란드 등 영국을 견제하던 국가도 대륙군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지금이 영국을 흔들 수 있는 찬스였다. 1778년.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다음 해에는 스페인이 영국에 대고 또 선전포고를 했다. 네덜란드 등 나라는 돈을 풀어 대륙군을 지원했다.
영국 정부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철수한 영국 주력군은 뉴욕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이곳만은 내주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대륙군 입장에선 결정적 한 방이 필요했다. 한 번만 더 크게 이기면 영국군의 모든 전투 의지를 빼앗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행운은 끝내 그 자리를 지켰다.
녀석들이… 언제 여기까지 왔어?
1781년 9월. 북미 남부 지역 영국군을 지휘하던 찰스 콘월리스는 당황했다. 콘월리스는 워싱턴의 대륙군이 당연히 영국 주력군과 맞서 뉴욕에서 대치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가 있는 버지니아 요크타운에 잔뜩 와있었다. 콘월리스의 병력은 독일 용병까지 합해 7000명 남짓이었다. 반면 대륙군과 프랑스군이 뭉친 연합군 수는 1만6000명 이상이었다. 그래도 요크타운은 요크강을 품고 있었다. 강줄기를 타고 올라가면 북미 동쪽 연안에 걸친 거대한 만, 체서피크만이 있었다. 이곳을 통해 원군을 요청하면 되는데…. 그 물길 위에도 영국 함대가 아닌 프랑스 함대가 있었다. 그러니까, 꼼짝없이 포위당한 격이었다.
V. Zveg, 체서피크만 해전(Second Battle of the Virginia Capes) |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첫째로 연합군의 연막전술이 있었다. 연합군은 목표가 오직 뉴욕 탈환밖에 없는 양 행동했다(실제로 워싱턴은 뉴욕에 집착했고, 거듭된 설득 끝에 뜻을 꺾었다는 설도 있다). 첩자의 보고를 받은 영국군은 더더욱 뉴욕 방어에만 집중했다. 영국군 전체가 기만작전에 속아 넘어간 셈이었다. 둘째로 프랑스 함대가 체서피크만에서 영국 함대를 상대로 깜짝 승리를 거두었다. 도박보다 더 도박 같던 몰방(沒放) 작전이 통한 결과였다. 프랑스 함대는 이 덕에 체서피크만의 제해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존 트럼불, 콘월리스 경의 항복, 1820년경, 캔버스에 유채, 365.7x548.6cm, 미국 국회의사당 |
하필, 하필 콘월리스는 북미 남부 지역에 퍼져있던 영국군을 요크타운 일대로 불러모은 상태였다.
민병대의 게릴라전에 신물이 나 차라리 뭉쳐있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 남부의 거의 모든 영국군이 궤멸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콘월리스는 맥없이 백기를 흔들었다. 무조건 항복이었다. 트럼불이 영국군 입장에선 치욕적인 이 순간을 또 그림으로 기록했다. 화면 중앙에 흰말을 탄 이는 대륙군 장교다. 그 옆에는 영국군 장교가 초라하게 섰다. 그 뒤에는 영국군이 줄줄이 붙었는데, 모두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륙군 장교가 팔을 뻗는다.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영국군 장교의 검이다. 어서 무기를 바쳐 항복의 예를 표하라는 것처럼 여겨진다. 요크타운 전투에서 연합군 측 전사자는 88명이었다. 반면 영국군 측 전사자는 309명이었다. 포로로 잡힌 이도 7416명에 이르렀다. 최강군은 또 치욕을 맛봤다.
오귀스트 쿠데, 요크타운 공선전(General Rochambeau and general Washington give last orders before an attack), 1836 |
독립 전쟁은 요크타운 전투 이후로도 2년가량 이어졌다.
하지만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영국은 결국 1783년, 북미 13곳 영국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내용의 파리 조약을 맺었다. 종전 선언이었다. 비로소 미합중국(美合衆國)이 된 미국은 1787년 헌법을 제정했다. 이제는 오직 미국만을 위해 일할 새로운 통치자가 필요했다. 모두가 지목하는 적임자가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농장 일을 하던 사내, 워싱턴이었다. 워싱턴은 만장일치로 미국 최초, 세계 최초의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로써 미국 독립 전쟁의 대서사시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품은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사가 쓰이기 시작한다. 독립 전쟁의 향방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미국에는 자유의 여신 이전에 행운의 여신이 있었던 건 아닐지.
〈참고 자료〉
조지 워싱턴, 김형곤, 살림
미국 독립전쟁, 김형곤, 살림
미국사 산책,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길버트 스튜어트, 조지 워싱턴, 1803, 캔버스에 유채, 73.5x61.6cm, 클라크 미술관 |
〈후암동 미술관 역사편 읽는 순서〉
①“아빠! 저게 뭐야?”…8세 딸 ‘매의 눈’ 학계 난리났다, 믿기 힘든 광경 포착 - 알타미라 동굴 벽화 (24. 8. 17.)
②“볼거리·노리갯감 전락 지긋지긋”…근육男들 격분에 모두 벌벌 떨었다, 무슨 일 - 스파르타쿠스 (24. 9. 14.)
③“18세 소녀가 軍지휘관이라니!”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했던 그녀 행보…어땠길래 - 잔 다르크 (24. 9. 21.)
④“단두대 못 찾겠어요” 18살 소녀 사형수 울컥…눈 가린채 울음 삼킨 사연 - 제인 그레이 (24. 8. 10.)
⑤ “제발 그만” 子아내 마구 때려 유산시킨 父…항의하는 아들에게도 똑같은 짓 - 이반 4세 (24. 8. 31.)
⑥“실패하는 순간 죽습니다” 이판사판 도박, 이게 먹혀들었다?…역사 통째로 바꿨다 - 조지 워싱턴 (24. 9. 28.)
⑦“저도 사람이에요!” 절규에도…‘인간 사냥’ 최악의 흑역사, 대체 무슨 일이 - 노예선 (24. 9. 7.)
⑧“보정 해도 너무했다” 늠름한 초상화의 충격적 진실…실상은 어땠나했더니 - 나폴레옹 1세 (24. 8. 24.)
길버트 스튜어트, 조지 워싱턴, 1797, 캔버스에 유채, 241.3x151.9cm, 백악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