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 ‘무죄’의 무게
2022-07-19 11:23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할 때 “낫 길티(Not guilty)”라고 한다. 유죄가 아니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 ‘내 결백이 입증됐다’거나 ‘재판부도 나의 억울함을 인정했다’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사실과 다르다. 법원의 무죄 판결 중 십중팔구는 ‘매우 또는 다소 의심스럽지만 공소 사실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에 가깝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다른 사람의 지갑을 가지고 나와 절도로 기소된 피고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변호인은 피고인이 그 지갑을 가지고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본인의 지갑으로 오인해 가지고 나왔다’든지, ‘분실품으로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가지고 나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이 아닌 제3자가 지갑을 가지고 나온 것으로 밝혀져 무죄가 되는 경우보다는 지갑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피고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이유, 또는 피고인이 지갑을 가지고 나온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절도의 의사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유죄 판결에서 요구되는 증명의 정도를 높게 설정할 경우에 무고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작아지겠지만 진범임에도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반대로 증명의 정도를 낮게 설정할 경우엔 진범임에도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작아지겠지만 무고한 이가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법은 진범이 100% 유죄 판결을 받고 무고한 사람은 100%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토록 완벽한 제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관한 선택의 문제가 된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격언은 유죄 판결을 위해 필요한 증명의 정도가 높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국가들의 형사사법제도가 취하는 공통된 입장이기도 하다.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 참고인 진술조서 등을 보면 누구나 피고인이 ‘나쁜 놈’이라는 심증을 가지게 된다.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는 피의자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요한 진술만을 취사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소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피고인이나 변호인은 공개된 법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할 수 있고, 자신에게 불리한 참고인의 진술을 탄핵할 수도 있다. 기소 전이 검사의 시간이라면, 기소 후는 변호인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공판중심주의, 직접심리주의이다.

미국이나 독일 등 법치주의가 정착된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안에 공판중심주의, 직접심리주의가 정착되는 등 많은 성과도 이뤘다.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과거에는 ‘기소=유죄’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이제는 수사기관에서 작성된 조서를 기초로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된 법정에서 이뤄진 증인의 증언을 통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법원도 과거에는 유죄를 쉽게 인정하되 양형을 관대하게 하는 편이었다면, 이제는 유죄는 엄격하게 판단하되 일단 유죄로 인정되면 양형은 엄정하게 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렇게 유무죄를 가르는 판결에 이르기까지는 항상 치열한 증거 확보와 법리 다툼, 그리고 무거운 고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무죄’의 의미와 달리 형사재판에서 무죄는 ‘결백하여 죄가 없다’가 아니라 ‘무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무죄는 ‘이노선트(innocent)’가 아니라 ‘낫 길티(not guilty)’이다. 이것이 단 한 명이라도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의 결단인 것이다.

민철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전 서울동부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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