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사태로 드러난 ‘금융 제국’ 미국의 허술함…“교과서도 안 봤나” 美전문가들 쓴소리
2023-03-15 16:04


[EPA]

[헤럴드경제=김우영 기자]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은 표면적으로는 급박한 예금 인출에 따른 유동성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주지만, 고질적인 기업 지배구조(거버넌스) 부실 문제에서 금융계도 자유로울 수 없단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15일 미국 재무부 장관을 지닌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SVB 경영진은 교과서적인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금리가 오르면 자산 가치가 떨어져 문제가 발생한다”고 적었다.

서머스 교수의 극히 상식적이고 짧은 일침은 그만큼 SVB가 은행의 기본적인 위험 관리(리스크 매니지먼트)에 둔감했단 것을 잘 보여준다.

뉴욕타임스(NYT)는 SVB 경영진이 앞날과 혁신에 대한 이야기에 몰두하느라 정작 리스크 매니지먼트라는 일상적이고 엄청나게 중요한 일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레그 베커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경영진은 네트워킹 이벤트를 열고 저녁 만찬을 주최하면서 리스크 매니지먼트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혁신과 기술발전에 열광했다. 은행가가 아닌 마치 벤처캐피털처럼 행동한 셈이다. 베커 CEO는 심지어 파산 사흘 전 한 행사에서 “창업하기 매우 좋은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사이 SVB의 고객은 변동성이 크고 위험한 기술 스타트업에 집중됐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심사관을 역임한 마크 윌리엄스 보스턴대 교수는 “벤처캐피털은 매우 위험한 산업”이라며 “SVB는 대출과 예금 고객을 다양화하는 고전적인 은행 접근법에 더 의존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 사이 자산 구성은 엉망이 됐다. 2022년 말 SVB는 자산의 55%에 해당하는 1200억달러를 투자증권으로 보고했다. 이는 미 전체 은행 평균의 2배가 넘는 규모다.

특히 SVB는 자산의 대부분을 미 국채 장기물과 MBS로 채웠다. 또 이들의 75%를 만기보유채권(MTS)로 분류했다. 자산 10억달러 이상 은행의 지난해 말 만기보유채권 비율은 6% 가량인 점을 감안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수익률만 보느라 자산 편중에 따른 위험 증가는 도외시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자율 위험 노출이다. 미 국채는 대표적인 안전자산이란 점에서 신용 위험은 거의 없지만 국채에 지나치게 편중된 탓에 이자율 급등에 따른 자산 가치 하락 위험(이자율 위험)은 커졌다.

SVB 보유 채권의 가중평균 듀레이션은 6년이다. 금리가 1% 오르면 가치가 6% 떨어진다는 의미다. 연준의 금리 인상 움직임이 없던 시절 장기물 위주의 투자 전략은 수익률 제고를 위해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지난 1년 간의 긴축 강화는 SVB에게 불덩이와 같았다.

결국 SVB는 금리 급등으로 인한 매도가능증권(AFS)의 막대한 미실현손실과 이로 인한 기타포괄순익누계(AOCI) 출혈을 막으려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 결정이 AFS 매각이었고 18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중요한 건 어느 은행이든 자산·부채는 채권들로 가득차 있단 것이다. 그만큼 금리 위험은 은행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흔한 위험 요소다. 이를 헤지하기 위해 보통 스와프 계약 등 파생상품을 이용해 대응한다. 하지만 지난해 말 기준 금리 위험을 헤지하기 위한 SVB의 금리 파생상품 명목가치는 5억5000만달러에 불과했다. 이자율 위험에 사실상 무방비로 노출돼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을 어떠한 내·외부의 통제 및 감시 장치는 없었다.

SVB의 최고위험책임자(CRO)는 지난해 4월 물러난 뒤 8개월 간 비어있었다. SVB는 어느 은행 못지 않은 훌륭한 리스크 매니지먼트 매뉴얼이 있었지만 CRO의 장기 부재는 문서상의 글씨와 실제 행동 간 단절을 키웠다.

올해 1월에야 새 CRO가 부임했지만 커져만 가는 이자율 위험과 유동성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전략을 당장 세우고 대응하기엔 턱없이 시간이 부족했다. 혹은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10년 전 SVB자산운용을 떠난 아담 딘 전 사장은 NYT에 “베커 CEO는 회사를 철저히 통제했다”며 “SVB는 베커의 종교집단이었다”고 말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측한 모세스벤처스의 대니 모세스는 NYT에 “(SVB파산은) 은행 차원의 탐욕 때문이 아니다”라며 “잘못된 리스크 매니지먼트일 뿐”이라고 밝혔다.

정부 규제도 허술했다. 2010년 금융 규제를 강화하는 ‘도드-프랭크법’이 제정됐지만 2018년 개정되면서 건전성 규제 대상이 되는 은행 자산기준이 500억달러에서 2500억달러로 상향됐다.

SVB의 총자산은 2022년말 2147억달러였다. 규제 완화로 SVB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나 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 같은 유동성 규제는 적용받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베커 CEO가 일부러 2500억달러 아래를 유지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턱을 높이려 열심히 로비를 펼쳤다고 지적했다.

클리포드 로시 메릴랜드대 교수는 “불안정한 분야에 대한 과도한 집중, 형편없는 투자전략,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부재와 부실한 관리감독이 SVB를 망쳤다”며 “SVB 파산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노력에도 은행들이 망할 수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점을 일깨운다”고 지적했다.



kw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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