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강제추행죄 판단기준 완화…‘항거 곤란’ 법리 폐기
2023-09-21 15:29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과 12명의 대법관이 21일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대법원 제공]

[헤럴드경제=안대용 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추행죄에 규정된 ‘폭행·협박’의 판단기준을 완화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기존 판례는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일 것’을 요건으로 했으나 이날 판결을 통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로 해악을 고지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례를 변경했다. 앞으로 법원의 강제추행 판단 기준이 바뀌게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벌금 1000만원 선고한 원심 파기환송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등 혐의를 받는 A씨에 대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지난 2014년 A씨가 10대였던 사촌동생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안이다. 기본법인 형법은 강제추행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해 추행한 경우 처벌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 성폭력처벌법 등 특별법도 이를 토대로 강제추행죄의 가중처벌 조항을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에 대해 대법원은 그동안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판단했다. 폭행행위 자체가 곧바로 추행에 해당하는 경우(기습추행형)에는 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일 것을 요하지 않고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가 있는 이상 요건에 해당한다고 봤다. 폭행 또는 협박이 추행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수단이 된 경우(폭행·협박 선행형)에는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요구된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하급심이 군사법원에서 진행됐다. 보통군사법원에서 진행된 1심은 A씨에게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고등군사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공소장 변경에 따라 A씨에 대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계 등 추행) 혐의가 추가됐다. 하지만 2심은 A씨의 물리적 힘의 행사 정도가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였다고 볼 수 없어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간적 간격을 전제하고 있어 기습추행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위적 공소사실인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을 무죄로 판단하고, 예비적 공소사실인 위력에 의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계 등 추행)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강제추행죄 폭행·협박 판단 기준 40년 만에 변경

김명수 대법원장이 21일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대법원 제공]

하지만 이날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여한 김명수 대법원장과 11명의 대법관은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일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며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보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기존 판례 법리를 폐기한 것이다.

12인의 다수의견은 항거곤란을 요구하는 기존 판례 법리가 강제추행죄 범죄 구성요건에 부합하지 않고,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인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강제추행죄에서의 폭행 또는 협박은 형법상 폭행죄 또는 협박죄에서 정한 ‘폭행 또는 협박’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명히 정의돼야 하고, 이는 판례 법리와 재판 실무 변화에 비춰볼 때 법적 안정성 및 판결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수의견은 “이는 종래의 판례 법리에 따른 현실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칫 성폭력범죄의 피해자에게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을 토대로 형평과 정의에 합당한 형사재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며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으로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을 요구하는 종래 판례 법리는 그 의미가 상당 부분 퇴색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피고인의 행위는 피해자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해 강제추행한 것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원심 판결에 논리와 경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강제추행죄의 폭행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하급심이 군사법원에서 열렸지만 2021년 군사법원법이 개정되면서 향후 다시 열리는 항소심은 서울고법이 맡게 됐다.

별개의견을 낸 이동원 대법관은 기존 판례 법리가 타당하므로 유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기존 법리에 따르더라도 주위적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는 것이 상당하다며 다수의견에 동의했다.

대법원은 이날 전원합의체 판결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에 관해 1983년부터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한 종래 판례 법리를 40년 만에 변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판결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법문언 그대로 해석하자는 취지이지 법 해석만으로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번 판결의 쟁점이 폭행 또는 협박이 추행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경우에 대한 종래 판례 법리를 유지할 것인지 여부이고, 기습추행형 강제추행죄에 대해서는 다수 법정의견에서 쟁점으로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김 대법원장은 이날 전원합의체 선고를 마지막으로 임기를 마무리하게 됐다. 퇴임식은 22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dand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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