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시부야에서 출근하는 시민들 [123RF]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일본 정부가 23년 만에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탈출’ 선언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본 기업들은 올해 임금 대폭 인상으로 측면지원에 나섰다.
4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봄철 대기업 임금협상인 춘투(春鬪) 결과, 일본의 대기업들이 경쟁하듯 대폭적인 임금 인상 방침을 내세웠다고 보도했다.
노무라홀딩스 자회사인 노무라 증권은 올해 입사 3년 이하의 젊은 직원들의 임금을 평균 16% 인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증권사는 내년 입사하는 직원들에게 전년 대비 8.2% 인상된 월 26만5000엔(약 235만7000원)을 초봉으로 지급할 계획이다.
요코하마 은행도 젊은 직원을 중심으로 대폭적인 임금 인상을 계획하고 있다. 요코하마 은행은 내년 신입사원 초봉을 15.4% 가량 올려 월 26만엔(약 231만3000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이 은행의 전체 평균 임금 인상률은 7% 정도로 저연차 직원에 임금 인상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무라의 일본 내 경쟁사 중 하나인 다이와증권그룹도 현지 직원들에게 7% 이상의 임금 인상을 제안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일본 민간 조사기관 도쿄상공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임금인상 예정인 기업은 85.6%로 정기적인 조사를 시작한 2016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규모별 시행률에서는 대기업 93.1%, 중소기업 84.9%였다. 임금인상 내용은 기본급이라는 응답이 62.5%로 전년도(2023년 8월)보다 6.1% 상승했다. 이미 일본 최대 대형마트 ‘이온 몰’은 올해 정규직 임금을 7% 인상했다.
앞서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은 올해 임금인상 목표를 1992년 이후 최고폭인 ‘4% 초과’로 정했다.
1990년대 ‘거품(버블) 경제’ 붕괴 이후 느린 임금 상승률과 고용 동결은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일본 기업들은 역대 최악의 장기불황 속에 신규채용을 동결하다시피 했고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졸업과 동시에 비정규직 또는 실업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특히 입사 연차에 따라 임금 수준이 정해지는 연공서열제는 신입사원들의 임금을 크게 높이지 못하게 가로 막는 장애물로 지적돼왔다. 2022년부터 일본 정부는 ‘임금 인상’이 사회 구조적 현상으로 자리 잡도록, 연공서열제가 기본인 일본의 임금체계를 직무급제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마구치 케이이치로 노동정책 연구소 소장은 “장기 고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연공 서열제의 폐지는 꾸준히 검토돼왔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저연차의 임금을 중점적으로 높이고 관리직 등은 업무 내용과 성과에 따라 인상률을 결정하겠다는 계획을 내고 있다.
일본 대기업들이 앞다퉈 임금인상에 나선 것은 젊은 직원들의 이직을 막는 동시에 기시다 현 정부의 임금인상을 통한 ‘탈디플레이션’ 정책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쿄상공리서치는 “물가상승이 계속되는 가운데 임금인상의 금액과 확대가 경기회복 여부를 좌우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가 디플레이션 탈출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지난 3일 보도했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의 우에다 가즈오 총재 역시 지난달 22일 국회에서 최근 물가 동향에 대해 “디플레이션이 아닌 인플레이션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다만 교도통신은 "정부 내에는 이른 시기에 디플레이션 탈피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다만 대기업의 임금인상 추세에도 경제 전반을 끌어올릴 정도로 가계 소비가 활성화할지는 미지수다. 닛케이는 “임금 인상의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며 “중소기업은 대기업 수준의 임금인상을 단행할 수 없을 뿐더러, 물가 상승률이 이보다 높으면 실질 임금이 감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계 소비의 40%를 차지하는 고령 인구에 임금 인상 혜택이 거의 미치지 않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며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해제 후에도 금리 인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도 일본 경제 선순환에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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