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일명 G밸리) 조성 당시의 모습(왼쪽)과 2023년 현재 첨단 산업단지로 변모한 G밸리의 전경. [한국산업단지공단 제공]
〈산업단지는 지난 60년 간 경제 성장과 수출 촉진의 기틀이 됐고, ‘한강의 기적’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2024년 11월 산업단지 60주년을 앞두고 3회에 걸쳐 국가경제의 중추역할을 맡은 산업단지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고, 기술 급변 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망해본다.〉
1964년 11월 연간 수출누계가 사상 처음 1억달러를 돌파했다. 31년 뒤인 1995년 수출액은 1000억달러로 불어났다. ‘한강의 기적’이었다. 1억달러를 갓 돌파했을 당시 정부는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해법을 ‘수출’이라고 봤다. 자본·자원·기술 모두 부족했던 그 때 재일교포들의 자본을 끌어들여 공장을 지었다. 수출 선봉장에 설 기업들을 한 곳에 모을 만한 인프라 구축이 절실했다. 산업단지의 조성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4년 정부는 수출을 위해 교통이 편리하고 항만시설이 가까운 곳, 토지수용이 원활한 곳을 기준으로 산업단지 후보지를 물색했다. 서울 구로동과 인천, 부평이 최종 선정됐다. 1965년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가 제일 먼저 첫삽을 떴다. 산업단지의 태동을 알리는 서막이었고, 산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의 불씨도 이 때 지펴졌다. 산업단지의 역사는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기적을 일궈낸 토양이었다.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에는 트랜지스터와 라디오를 생산하는 동남전기공업 공장이 가장 먼저 준공됐다. 10개 국내기업과 써니전자를 비롯한 20개 재일교포 기업, 1개 미국기업 등 31개 업체가 입주해 외화벌이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구로동 일대는 인적이 드문 허허벌판이었다. 주변에 안양천이 있어 공업용수 확보가 쉽고, 경부선 영등포역과 5km여서 교통도 편리했다. 구로공단은 수출전선의 선봉에 섰다. 당시 의류, 신발, 가발, 인형 등 봉제품을 만드는 여공들의 재봉틀 소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70년대 들어 산업단지는 변화를 모색했다.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려면 경공업만으로는 어려웠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재도약이 불가피했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포항은 철강, 여천은 석유화학, 창원은 기계, 거제는 조선, 구미는 전자, 온산은 비철금속 등으로 업종별로 특성화한 산업단지가 새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7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 20.9%란 고도성장을 일궜다. 1979년 중화학공업 비율은 전체 산업의 51.2%를 차지해 변신에 성공했다.
80년대 들어선 인구와 산업의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고 국토 균형개발 차원에서 산업단지가 호남으로 확장됐다. 당시 광양(철강), 군산(자동차) 등 서해안을 중심으로 산업단지가 집중 조성됐다. 동남권 편중을 해소하는 동시에 중국의 개방 등 대외적 정세 변화에 대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80년대 중반 2차 오일쇼크와 수출침체, 임금상승으로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돼 노동집약산업 중심의 단지도 전환기를 맞았다. 시대 변화에 따라 90년대 들어선 첨단 기술산업 육성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산업단지 개발이 추진됐다. 광주첨단과학단지, 오송생명과학단지, 파주출판단지 등이 이 시기에 조성됐다.
한국산업단지공단 관계자는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경공업, 중화학공업, 첨단산업으로 압축성장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산업단지라는 인프라 조성이 있었다. 이를 통해 시대별로 필요한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했다”며 “이제 산업단지도 산업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변신을 꾀해야 할 시기”라고 했다.
▶국가 제조업 중 산업단지 경제비중 추이
구분 2003년 2012년 2022년
생산 52.2% 68.6% 62.5%
고용 30.8% 46.5% 48.3%
수출 68.6% 80.7% 63.2%
*자료=2024년, 8월. 한국산업단지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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