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 1400개 박힌 킬힐·80cm 롱부츠…‘킹키부츠'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다 [백스테이지]
2024-11-02 08:01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하나의 무대가 만들어지기까진 수많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스포트라이트는 무대 위의 ‘주인공’에게 쏟아지나, 그 뒤엔 자신의 이름을 감춘 무명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물질하며 자신만의 숨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무대 뒤의 모든 존재를 담아 들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엇을 상상하든지 난 그 이상이지, 이렇게 부드러운 살결, 내 몸에 반할걸, 나는 자유 나는 욕망, 난 모순적인 그대 환상” (뮤지컬 ‘킹키부츠’ 넘버 ‘랜드 오브 롤라’ 중)

아찔한 킬힐에 스와로브스키가 촘촘히 수놓아진 새빨간 미니 원피스를 입은 롤라(강홍석 분)가 등장하면, 공연장은 감당 못할 데시벨로 채워진다. K-팝 스타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함성과 함께 슈퍼스타 롤라는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파워풀한 목소리가 담아낸 소울, 템포를 가지고 노는 ‘미친 에너지’는 전 세계 뮤지컬 사상 다시 없을 등장신이다. “세이 마이 네임(Say my name)”이라며 근육으로 다져진 거대한 두 팔을 들어올리면, 그의 이름이 절로 나오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1979년 영국 노샘프턴. 수제화 공장이 줄줄이 폐업하던 시기, 드래그 퀸(남장 여자)을 위한 특별한 부츠를 제작해 살아남은 한 신발 공장의 실화가 다큐멘터리(1999)와 영화(2005), 뮤지컬(2012)로 만들어진다. 그것이 바로 ‘킹키부츠’다. 2014년 한국으로 상륙한 뮤지컬은 눈과 귀를 자극하는 화려한 의상과 신발, 세계적인 팝스타 신디 로퍼가 작사·작곡한 중독성 강한 노래, 격렬한 춤을 보여주며 지난 10년간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작품은 드래그 퀸 롤라와 아버지가 일궈온 신발 공장 ‘프라이스 앤 선’을 물려받은 초보 사장 찰리, 롤라의 유쾌한 친구들인 여섯명의 엔젤과 공장 사람들이 이끌어간다. 여기에 이름을 감춘 숨은 주인공들이 또 있다. 드래그퀸과 신발 공장 소재를 완벽히 빛내주는 존재들. 등장인물 통틀어 총 45벌에 달하는 의상과 20켤레의 신발들은 이 작품의 정체성과도 같다.

10주년 공연에 한창인 한국의 ‘킹키부츠’를 이끌고 있는 심상혁 의상제작팀장은 “의상은 캐릭터를 완성시켜주는 역할이자 캐릭터의 상황과 심적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존재”며 “배우들은 좋은 의상을 입었을 때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물론 해당 캐릭터에 온전히 이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단 하나의 오차도 불허"…이젠 국내에서 의상 자체 제작

80㎝에 달하는 붉은 부츠, 가늘고 날렵한 힐 위에 올라선 복싱선수 출신의 드래그 퀸. 롤라는 대대로 육중한 근육질 몸을 자랑한다. 헬스 트레이너처럼 강인한 몸으로 여자 옷을 입어야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롤라. 그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은 킬힐과 의상이다.

‘킹키부츠’의 의상은 디자이너 그레그 반즈의 손 끝에서 태어났다. 전 세계 17개국에서 무대가 올라갈 때마다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킹키부츠’의 것에서 단 하나의 오차도 발견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똑닮은 쌍둥이 의상과 부츠를 만들어내는 것이 각국 의상제작팀의 숙명이다.

심상혁 의상제작팀장은 “초연 당시 오리지널 팀이 전체 의상을 직접 제작한 이후 2016년 재연, 2018년 3연, 2020년 4연, 2022년 5연, 2024년 6연까지 오는 동안엔 한국에서 자체 제작 시스템으로 달라졌다”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라이선스 뮤지컬은 원작 창작진의 요구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작품의 골자가 되는 노래와 대본은 물론 무대 위 작은 소품 하나부터 배우들의 의상과 신발까지 철저하고 꼼꼼하게 통일성을 강조한다.

심 팀장은 “오리지널 팀이 제작한 초연 이후 한국에서 처음 제작을 했을 당시 컨펌에 컨펌을 거치는 과정을 반복한다”며 “아주 작은 차이는 관객들이 보기에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의상과 부츠 제작에선 전문가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오리지널 작품과 ‘똑같다’는 반응이 나와야한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빠른 트렌드 변화에 옷감 단종…전세계 뒤져서 공수

청량한 새빨강과 차가운 푸른빛, 은은한 화려함을 품은 보랏빛과 상큼한 라임색…. 드래그 퀸 롤라와 엔젤들의 의상은 화려함의 끝판왕이다. 의상팀에 따르면 ‘킹키부츠’의 의상과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색감’이다. 각각의 의상마다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색감의 소재를 구하기 위해 제작팀은 서울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다.

한국에서 어느덧 10년째 올라가고 있는 ‘킹키부츠’가 마주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한국의 특수한 사회 분위기다. 이젠 명실상부 ‘트렌드의 나라’가 되다 보니 해마다 트렌드가 빠른 속도로 달라진다. 이에 특정 작품의 의상 제작을 위해 옷감이 10년 가까이 버티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특정 소재나 컬러, 패턴이 유행하면 해당 제품이 시장을 휩쓸기에 과거 유행한 디자인의 소재와 컬러 옷감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심 팀장은 “우리나라는 너무나 유행이 빨라서 10년 전에는 구할 수 있었던 소재였지만 5년만 지나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며 “초연 때와 똑같은 소재로 의상을 제작하기 위해 동내문 시장은 물론 서울 시내의 모든 가죽 시장, 원단 시장을 발품 팔아 샅샅이 뒤진다”고 했다.

‘킹키부츠’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어본 옷감의 종류가 모두 나온다. 가죽은 물론 실크, 로직, 면, 마, 니트, 애나멜, 레이스 등등 다양하다. 톡톡하고 부드러운 소재로 푸른 바탕에 블랙의 무늬가 그려진 롤라의 블라우스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원단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국에선 찾을 수 없는 소재였다. 이런 의상들의 옷감은 보통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공수한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의상팀에 따르면, 이 블라우스의 경우 미국에서 원단을 공수, 무늬와 컬러를 직접 만들어 오리지널 버전의 의상과 똑같이 만들었다. 독특한 문양은 프로그램 작업을 통해 프린팅을 한 뒤, 하나하나 정교하게 맞추는 작업을 거쳤다. ‘킹키부츠’의 모든 의상과 부츠는 100%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극중 롤라의 의상은 총 15벌. 엔젤은 한 명당 6벌의 의상을 가지고 있다. 롤라의 의상 중 가장 제작이 오래 걸리는 의상은 피날레 원피스로, 비즈를 꿰매는 데에만 무려 한 달이 걸린다. 심지어 투명 트리스탈을 염색해 다양한 비즈를 만들어야 하기에 유달리 손이 많이 간다. 롤라는 공연 이후 땀 범벅이 되더라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옷을 무대 밑으로 내려와 불과 2분 동안 의상을 갈아입고 다시 무대로 나가야 한다.


'킹키부츠' 속 롤라가 아버지의 요양원에 가서 부르는 '그대 맘 속에 나를 새겨줘' 장면 [CJ ENM 제공]

제작과 관리가 가장 까다로운 의상은 롤라가 아버지의 요양원에 방문해 ‘홀드 미 인 유어 하트(Hold Me In Your Heart)’를 부를 때 입는 노란 드레스다. 폭 넓은 실크를 여러 겹 겹쳐 제작한 이 의상을 입은 롤라는 마치 셀린 디옹 같은 디바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우아한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 의상이다.

17개의 나라에서 ‘킹키부츠’가 올라가고 있지만 완벽한 손기술과 정교함은 한국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 심 팀장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작품을 봐도 한국의 ‘킹키부츠‘의 의상이 뉴욕 오리지널과 가장 비슷하다”며 “지금까지 현지 창작진에게 ’이건 아닌데‘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리지널 팀으로부터 ‘한국은 체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완벽한 일치를 만들어낸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80kg 男배우도 견딜 킬힐 부츠의 비밀은

‘킹키부츠’가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한국 의상제작팀엔 엄청난 과제가 떨어진다. 거구의 남성 배우들이 신어야 할 튼튼하고 안전하면서도 ’아름다운 부츠‘를 만드는 일이다. 이 과정은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망해가던 신발 공장의 사장 찰리가 드래그 퀸의 ’부츠‘를 제작하며 마주한 고민과도 같다. 편하게 생활하면서도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할 수 있는 부츠, “아무리 양심 없는 몸뚱이도 올라탈 수 있는” 신발을 만드는 것이다.

전체 길이 80㎝, 굽 높이 15㎝의 부츠 위에 183㎝의 키에 85㎏의 롤라(강홍석 기준)가 올라서려면 부츠 제작엔 엄청난 노하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부츠 역시 뮤지컬 속 프라이스 앤 선스 공장이 부츠를 만드는 노하우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강철’을 넣어 만든 것이다.

의상팀에 따르면 ‘킹키부츠’ 속 신발들은 강철을 넣어 제작된다. 허리쇠(발바닥 부분)에 강철 심을 넣어 배우들이 신었을 때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제작하는 것이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도 무대에서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다 보면 부츠는 닳기 마련이다. 구두 굽의 손상은 배우들의 안전 문제와 직결하는 만큼 제작팀이 수시로 점검, 흠집과 손상을 발견하면 즉시 수선, 교체한다.

부츠들의 제작 과정과 기간도 만만치 않다. 부츠는 배우들이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제작에 착수해야 한다. 캐스팅이 결정되면 적어도 개막 넉 달 전부터 배우들을 소집해 피팅부터 시작한다. 발길이, 폭, 종아리 사이즈, 기장 등을 꼼꼼히 확인한다.

각 배우들에게 딱 맞는 수제화의 제작인 만큼 일대일 맞춤형 부츠가 태어난다. 사실 모든 배우가 자신이 가장 편하게 신는 사이즈와 통이 다르다. 심 팀장은 “어떤 배우는 조금 여유롭게 맞아야 편하다고 느끼고, 어떤 배우는 타이트하게 맞아야 춤을 출 때 좋다고 한다”며 “저마다 각자에게 딱 맞는 핏이 다르기에 부츠를 만들 때는 더 꼼꼼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부츠를 만들기 위한 소재 공수가 마무리 되고, 배우들의 피팅을 토대로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한다. 한국판 ‘킹키부츠’의 제작은 오직 한 사람의 손에서 태어난다. 국내에서 현재 드래그 퀸 신발을 만들고 있는 수제화 장인이다. 이 디자이너의 신상은 ‘기밀 사항’이다.

심 팀장은 “드래그 퀸 신발 장인을 찾기까지 굉장히 힘이 들었다”며 “남자 사이즈의 힐을 만드는 사람이 없는데다 지금까지 드래그 퀸의 신발은 내구성이 좋지 않아 뮤지컬 무대에 적합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장인을 찾은 이후 하나 하나 수작업을 통해 (부츠가) 만들어져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안전하게 공연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금도 부츠 제작의 핵심은 어떤 몸무게도 버틸 수 있는 안전한 부츠를 만드는 것이다.

여섯 명의 엔젤은 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다섯 켤레의 신발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롱부츠는 15cm, 낮은 것은 12~13cm 정도다. 빼어난 라인을 보여줘야 하는 만큼 식단 관리도 필수다. ‘킹키부츠’에 엔젤로 출연했던 배우 전호준은 “엔젤들에겐 초연 때부터 운동하지 말고 다이어트하라는 주문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기 때문이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뉴욕 오리지널팀의 까다로운 기준도 부츠 제작의 난관 중 하나다. 의상팀에 따르면, 뉴욕 오리지널 팀은 이 공연의 초연 당시 신발 제작 과정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국내 의상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샘플을 제작해 보내면 퇴짜맞기 일쑤였고, 한 엔젤의 부츠는 몇 번씩 다시 제작하기도 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기술이 진화하면서 한국판 ‘킹키부츠’의 부츠의 제작 시간은 점차 빨라졌다. 또 내구성은 높아지고 디자인은 점점 더 살아났다. 화려한 신발들은 ‘부츠 장인’의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 태어난다. 트리쉬가 찰리에게 건네는 부츠엔 스와로브스키가 무려 1400개나 박힌 부츠도 있다. 이 역시 장인의 손으로 1400개의 스와로브스키를 붙인다.

피, 땀, 눈물의 제작기를 거친 만큼 의상제작팀의 시선에선 무대 위의 아찔한 순간들은 눈에 더 많이 들어온다. 공연 이후엔 힐과 밑창 체크는 필수다. 특히 굽의 경우 힘을 줘 움직거나 흔들어 보며 안전 상태를 확인한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CJ ENM 제공]

심 팀장은 “배우들이 공연을 마치고 신발 상태를 보면 양쪽 신발의 안쪽이 가장 많이 닳아 있다”며 “공연 후엔 언제나 양쪽 비즈를 일일이 다시 붙여 원상복귀시킨다. 배우들이 편하게 신고 공연할 수 있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아무리 공을 들인 신발이라도 ‘조심히 다뤄주세요’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무대 위에 오르는 부츠는 총 20켤레이나, 백스테이지엔 총 30켤레에 달하는 부츠가 대기 중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분의 신발을 넉넉히 준비해야 해서다. 시즌을 거듭하며 새로 제작된 수량을 모두 합치면 50켤레 이상은 된다.

맞춤형 수제화인 부츠는 보관도 중요하다. 비즈를 매일 점검하는 건 필수다. 부츠 보관의 핵심은 ‘행거에 걸어두는 것’이다. 바닥에 세워 둘 경우 꺾여버려 모양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연 후 창고로 향하게 될 때는 실리카겔과 뽁뽁이, 습작지를 채워 부츠가 납작해지지 않도록 밀봉한 뒤 다음 시즌을 기다린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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