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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변호인’된 박학기가 말하는 김광석
엔터테인먼트| 2014-01-20 11:00
그는 요즘 자신의 이름 대신 다른 호칭으로 더 자주 불린다. ‘김광석의 친구, 박학기’ 식으로 말이다. 고(故) 김광석 노래 부르기가 우리 사회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생긴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불린 건 18년 전, 김광석의 죽음 이후다. 그는 가끔 ‘김광석의 아바타’가 된 기분도 들지만 금세 친구가 그리워지고 눈가에 물기가 돋고 만다. 김광석 생전에 가장 가까웠고, 그가 죽기 불과 세 시간 전까지 같이 방송을 하고 나왔던 그다. 박학기(51)는 김광석이 가고 없는 세월 동안 어쩔 수 없이 김광석의 ‘변호인’이 됐다. 김광석 18주기 공연 준비로 분주한 그를 합정동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해마다 ‘올해만 해야지’ 하다가도 매년 이때만 되면 또 콘서트를 준비하게 돼요.” 김광석 추모위원회가 김광석 기일에 맞춰 조촐하게 꾸려온 음악회가 눈덩이 굴러가듯 판이 커져버린 탓이다. 김광석 사후, 학전 김민기 대표를 비롯해 같이 활동했던 동물원, 유리상자, 한동준 등 친구들이 모여 49재 눈물의 콘서트를 연 게 따지자면 김광석 콘서트의 시작이다. “1월 6일 기일이 되면 저절로 학전에 모이게 됐죠. 제사 지낸다 생각하고 영정 놓고 술 한잔 올리고 노래도 하고 그러다가 팬들이 찾아오면서 공연으로 굳어졌어요.”

그렇게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김광석 콘서트는 학전 200여석에 관객이 2000여명이나 몰려 추첨을 했다. 본격적으로 전국 공연이 된 건 대구에서 14주기 추모공연 때부터. 대구 소재 성우예술기획의 배성혁 대표가 어려웠던 시절, 김광석이 개런티 없이 공연을 열어준 빚 갚음을 14주기 추모공연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때도 이번 한 번만 하자 한 것이 이듬해엔 경북대에서 공연을 갖게 됐고, 마침 대구 방천시장에 김광석 거리가 생기면서 타 지역의 요청으로 이젠 전국 투어가 돼버렸다. 

“세상 떠나고 18년이 지났는데도 콘서트가 계속 열리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누구 한 사람이 김광석 콘서트를 만든 게 아니에요. 모든 사람 안에 김광석의 노래가 지닌 감정의 공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그게 음악의 힘이죠.”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의 구성은 자전거 탄 풍경, 동물원, 유리상자, 한동준, 박학기 등 ‘김광석 패밀리’와 초청가수, 신인가수로 구성된다. 세대를 아우르는 뜻에서 서인국, 홍대광, 박시환, 박재정 등 핫한 ‘젊은 피’는 필수다. 

올해는 콘서트가 2월 8일 대구를 시작으로, 2월 15일 부산, 3월 1일 대전, 3월 15일 인천, 3월 16일 경기 성남시 등 10여곳으로 늘어났다.

김광석 콘서트는 여타 공연과 다르다. 자연발생적이고 자발적이다. 공연 하나 하나가 가수에게는 수천만원 돈벌이지만 주말을 반납하고 노 개런티로 나선다. 그는 이걸 ‘포크음악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인연, 멋’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김광석일까.

“이 친구의 음악은 이념에 의해서 승부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양념이나 포장이 없어요. 지금 많은 음악이 퍼포먼스, 이미지, 머리색깔 하나 하나 상품성을 따져 포장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노래의 본질은 아닌 거죠. 그건 퍼포머이지 가수라고 할 수는 없어요. 김광석을 찾는 이유는 사전적 의미의 가수이기 때문이에요. 노래의 본질인 가사, 멜로디로 평가되는 거죠.”

박학기는 김광석의 노래를 식빵에 비유했다. 맹맹하고 별 맛 없지만 질리지 않고 그 자체로 먹어도 그만이고 다른 빵으로의 변신의 재료가 되는 빵의 존재 이유 같은 거다.

‘김광석 현상’의 중심에는 우리 사회 40, 50대의 향수, 문화적 갈망이 있다. 90년대 청년들이 아이돌 중심의 현 문화 속에서 소외되면서 우리에게도 뭔가가 있었다는 걸 김광석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게 복고 트렌드와 맞물렸다는 해석이다.


박학기는 김광석을 또 ‘지하철1호선’에 빗대기도 했다. 낡았지만 지금도 달리는 열차처럼 박제된 게 아닌, 삶의 길목마다 만나게 돼 있는 살아 있는 노래란 얘기다.

김광석은 ‘김광석의 친구들’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였기에 그들은 열 일 마다하고 그의 노래를 불러주는 걸까.

“‘김광석만큼 훌륭한 음악인이 없었나’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김광석은 나에게 뭐였나’ 물었을 때 사랑하는 친구였고, 광석이를 위해서면 내가 할 수 있어 그런거거든요. 광석이는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았고 거기서 모든 일은 시작된 거죠.”

그의 말을 들어보면 김광석은 본질 그 자체인 나목으로 서 있는 사람이었다. 

“광석이의 별명이 ‘또 해’였어요. 하나 공연이 끝나면 그 다음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거예요. 1000회 공연을 하려면 아플 때도 있고 노래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데, 광석이는 준비되지 않았을 때도 가수는 노래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생각할 때 고개를 끄덕이게 해주는 거죠.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사실 김광석과 박학기는 둘 다 기억도 없는 세 살 적 친구다. 대구 대봉동에서 김광석 아버님은 ‘번개전업사’를 하셨고, 한 집 건너 ‘모란양장점’이 그의 외갓집이어서 집안끼리 알고 지냈다. ‘서린라사’라는 양복점을 경영했던 그의 부친과 김광석의 아버님도 친분이 있었다. 한번은 김광석이 당시 유행하던 까만 코트를 입고 와 자랑하는데 코트 안쪽을 보니 ‘서린라사’라는 양복점 이름 밑에 테일러 이름으로 박학기 아버님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서린라사’에서 옷을 맞춰 입었던 김광석의 아버님 코트를 아들이 입고 나온 것이다.

김광석의 죽음 몇 시간 전, 박학기는 김광석, 장필순과 함께 현대방송에 들렀다. “방송을 하고 나와 봄에 조인트 콘서트를 할 계획을 얘기하다가 광석이가 홍대역으로 가자 했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공연을 앞두고 밤 12시에 연습이 잡혀 있어 갈 수 없어서 ‘끝나고 통화해’하고 헤어졌지요. 불과 세 시간 전 일이에요. 내가 그때 함께 있었으면 달라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그는 김광석을 음악인으로서 어떻게 평가할까. “김광석은 장르로 구분되지 않는 애죠. 이 친구의 가장 큰 업적은 다시 부르기, 리메이크를 만들어낸 거예요. 지금은 리메이크가 유행이지만 당시에는 자존심 때문에 남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요. 좋은 노래를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게 만든 게 그 사람의 역할인 거죠. 지금도 좋은 음악이 있는데 평가받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불러줘야죠.”

드문 미성의 소유자인 박학기는 지난해 미니앨범 ‘서정’을 냈다. 타이틀곡 ‘아직 내 가슴속엔 니가 살아’는 마로니에공원, 말간 하늘에서 벚꽃이 눈처럼 내리던 3월의 어느 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70, 80년대를 추억하며 만든 곡이다. 5년 전에 내놓은 싱글앨범 ‘비타민’은 딸과의 추억을 사진 한 장 남긴다는 마음으로 만든 앨범인데 의외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베스트셀러 앨범은 1집, ‘이미 그댄’이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교과서에도 들어 있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국민가요가 됐다.

그는 2년 전부터 기타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요즘의 코드가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어요. 배워야죠.” 그의 좌우명은 머라카락 자라는 만큼, 손톱이 자라는 만큼이다. 매일 조금이라도 성장하는 삶이다. “환갑 정도 되면 멋있는 뮤지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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