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북한이 12일 오전 3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북핵위기가 또 다시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하지만 북핵문제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북핵문제가 동북아를 넘어 전세계의 골칫거리가 된지도 이미 수십년 전 일이다.
북핵문제라는 암흑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1960년대 초반 구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기술을 토대로 원자로와 우라늄 정련·변환시설, 핵연료 가공공장, 재처리시설 가동에 들어갔다.
북한이 과거 두 차례 핵실험을 할 때 이용했던 플루토늄도 이들 시설에서 사용한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과정에서 추출한 것이다.
북핵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1993년 1차 북핵 위기 때였다. 구 소련의 발전소 건설을 조건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던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빌미로 1993년 3월 돌연 탈퇴를 선언했다.
이듬해인 1994년 6월에는 IAEA까지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클린턴 미 행정부는 북한의 핵시설이 밀집한 평안북도 영변 일대를 크루즈 미사일과 F-117 스텔스를 동원해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단추를 누르기 직전 단계에서 취소하기도 했다.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10월 북미간 핵포기와 경수로 건설을 주고받은 제네바협정에서 극적인 타협점을 찾았다. 하지만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고 2001년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북미갈등이 증폭되자 북한은 핵시설 재가동에 들어갔다.
이는 곧 2차 북핵 위기로 이어졌다. 북한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방북했을 때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을 시사하면서 2차 북핵 위기를 자초했다. 이는 2003년 시작된 6자회담을 통해 간신히 봉합 국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은 6자회담 진행중에도 플루토늄 핵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했으며 최소 세 차례에 걸쳐 40㎏ 정도의 플루토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를 바탕으로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은 이와 함께 2010년 11월 미 핵 전문가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를 초청해 현대식 원심분리기 시설을 공개하는 등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도 추진하고 있음을 공개했다.
북한은 그나마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존 때에는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며 비핵화 시늉이나마 냈지만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지난해 헌법에 ‘핵보유국’이라고 명시하는 등 핵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2일 감행된 3차 핵실험은 북핵 역사에서도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대원기자 shind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