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문제
‘방아쇠 없는 무기’ 삐라의 진화
뉴스종합| 2011-10-19 09:46
전단지 단골소재는 김정일 여자문제

최근 중동사태·남한 경제발전상 선전


돈·라디오·먹거리·소화제도 동봉

첨단도구로 원하는 지점 이동성 확보


실익 없자 북측 삐라는 사실상 사라져

대북전단 살포에 北 조준사격 대응 위협

접경지역 경제 심각한 타격 입기도



북한 노동당 창건 66년 기념일이자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사망 1주기인 지난 10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일명 ‘삐라’ 20만장이 북녘 땅을 향했다.

대형 비닐 풍선 10개에는 대북전단 20만장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화 1달러 지폐 1000장, 대북 단파방송을 들을 수 있는 소형 라디오 100개, 대한민국 경제발전상을 담은 소책자 200권과 북한 민주화 촉진 동영상 CD 300개도 함께 담았다. 7~8㎏에 달하는 대형 풍선은 궂은 날씨에도 찢기지 않을 만큼 질긴 플라스틱 비닐로 만들었다.

이 위험천만한 ‘풍선 날리기’는 북한의 ‘전면 전쟁’ 위협 속에 강행됐다. 북측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삐라 살포는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동족에 대한 공공연한 전쟁 행위”라며 위협의 수위를 높였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북한이 아무리 협박해도 북한 주민의 자유를 위한 외침을 막을 수는 없다”며 “굴하지 않고 대북전단을 계속해서 날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일 여성편력ㆍ건강상태, 단골 소재=삐라 살포를 주도하는 탈북자들은 “그래도 북한의 변화를 위해 삐라만한 것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에 와보니 김정일 정권의 실체에 대해 너무 몰랐다”며 북한 당국의 주입식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북한의 남은 동포들에게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이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김정일의 여자 문제와 건강 상태는 삐라에 오르는 단골 소재다. 북한 당국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북한 주민들이 정작 김정일의 근황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집트 등 중동의 장기독재정권의 몰락, 김정은 3대 세습에 대한 비판, 남한 경제발전의 실상 등이 주로 담긴다.

최근 삐라를 살포한 탈북자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은 황 전 비서가 남한에서 푸대접을 받다가 쓸쓸하게 죽었다는 북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황 전 비서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됐다고 전했다.

삐라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북한의 내부적인 체제 동요다. 군사적ㆍ외교적 수단으로 북한의 변화를 꾀할 수 없다면 북한을 가장 밑바닥부터 변하게 하는 민심이반을 노려야 한다는 것이다. 삐라를 통한 북한 내부의 정보 촉진활동이 김정일 건강악화와 3대 후계세습, 만성적인 경제난과 화폐개혁 이후 민심이반과 맞물려 북한 내부의 체제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근간을 이룬다. 실제로 단천의 인민반장 출신인 60대 아주머니와 남포에서 온 학생 등 삐라를 보고 탈북한 이들이 적지 않다고 탈북자단체들은 전한다. 


▶디지털 삐라=수십년에 걸친 ‘삐라 전쟁’은 냉전이 스러진 뒤에도 기술적 발전을 거듭했다. 과거 고무풍선과 바람에 의지하던 삐라는 이제 각종 디지털장비로 무장했다.

10만원 안팎의 GPS 추적기를 매달아 낙하지점을 추적할 수 있게 했다. 또 타이머를 부착해 일정시간 경과 후 북한 상공에서 저절로 터지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고무 풍선 대신 농업용 플라스틱 비닐로 대형 풍선을 만들어 그 밑에 삐라를 매단 것도 주요 변화다. 이렇게 만든 풍선은 높은 기압차에도 터지지 않고 멀리 날아가는 장점을 지녔다.

삐라 외에도 각종 먹거리와 담배, 라이터, 현금을 담아보내기도 한다.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을 겨냥한 과자, 북한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남한 드라마 DVD가 특히 반응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못 먹는 주민들에게 남한 소화제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역시 돈이다. 대부분의 풍선에 담아보내는 1달러짜리 지폐는 북한에서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 액수다.

손바닥만한 종이 쪽지에 불과했던 삐라는 이제 컬러 사진을 담은 전단지로 발전했고, 동영상을 담은 DVD와 USB 형태로 전달되기도 한다. 북한 가정의 70~80%가 DVD 플레이어를 소장하고 있어 DVD 삐라의 위력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삐라 신고하면 노트 주던 시절=반면 70~80년대 남한 전역에 대량 살포되던 북측의 삐라는 사실상 사라졌다. 삐라를 발견해 신고한 초등학생에게 연필과 노트 등 상품을 주고, 이를 많이 수거해 온 사람을 유공자로 선정해 표창하던 우리나라 규칙도 지난 2007년 폐지됐다. 전국 경찰관서가 삐라 수거 상황을 매월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북서 계절풍이 많이 불어오는 4월과 10월을 특별 수거 기간으로 설정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최근 수년간 수거 실적이 거의 없어 사문화된 상태였다.

이에 앞선 2004년 남북 당국은 제2차 남북장성급회담에서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 체결을 통해 방송과 전단 등 일체의 선전 활동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북측은 삐라 살포 중단을 남북 간 합의에 기반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보교류가 활발한 남한에서 북측 삐라 살포가 실익이 없다는 판단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삐라 대 삐라’ 전쟁은 이제 남측의 삐라와 북측의 위협 구도로 변화했다. 북측의 위협은 남한 내 또 다른 희생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강원도 철원, 인천 백령도 등 접경지역 주민이 그 주인공이다. 삐라 살포에 북측의 조준사격 위협이 잇따르자 지역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됐다는 주장이다. 안보 불안이 곧 기업실적으로 연결되는 개성공단 입주기업들도 삐라 살포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

북측의 거센 반발과 안보 위협, 죽음을 무릅쓴 탈북자들의 사명감을 뒤죽박죽 담은 거대한 풍선은 오늘도 평양 땅을 향해 날아오른다. 

김윤희 기자/wor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