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세계선수권 도중 27년 만에 단일팀을 이뤄낸 남북 여자 탁구 대표팀 선수들. 남북한 2개 팀에서 하나가 된 팀 코리아는 4일 4강에서 일본을 상대한다. [사진=대한탁구협회]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스포츠는 전쟁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전쟁하다가 통일한 격이다. 두 번 다시 재연하기 어려운, 영화 같은 이야기가 탁구에서 나왔다. 이쯤이면 남은 승부는 상관이 없다. 4강에서 세계 2위 일본에 져도 괜찮다. 또 결승까지 가서 절대강자 중국을 꺾는 기적이 나오면 감동이 극대화되니 더 좋을 뿐이다. 세계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대회 도중, 그것도 맞붙기 직전에 서로 다른 두 팀이 단일팀을 구성하는 기적이 발생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스웨덴의 할름스타드에서 열리고 있는 2018 세계탁구선수권대회(단체전)에 참가 중인 한국과 북한의 여자대표팀은 3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5시), 8강 맞대결을 펼치기 위해 경기장에 나섰다가 경기는 하지 않고, 사진 찍고 손만 흔들고 나왔다. 단일팀 구성한 것이다. 9명(한국-5명, 북한-4명)으로 늘어난 코리아팀은 4일 오전 11시(오후 6시) 일본과 맞붙는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지난 4월 27일 열렸다. 스웨덴 탁구선수권은 이틀 뒤인 29일 개막했지만 보통 선수들은 시차적응과 연습을 위해 1주일 전 현지에 가 있으니 ‘회담이 잘 성사되고, 단일팀을 구성해야지’ 하는 사전 준비는 없었다(실제로 단일팀을 구성한 후 새 유니폼을 맞출 여유가 없어 일본전은 남북이 각자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그렇다면 이 ‘대회 도중 단일팀’은 어떻게 성사된 것일까? 그리고 최초의 아이디어는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유승민 IOC 위원, 박창익 대한탁구협회 전무 등을 통해 ‘쾌거의 재구성’을 해봤다.
2일 열린 남북연합팀의 이벤트 복식경기 장면. [사진=대한탁구협회]
2일 저녁 8시 “이렇게 분위기 좋은데, 왜 내일 서로 맞붙나?”
대회 도중, 그것도 맞대결 직전 단일팀 성사의 비화는 2일 시작됐다. 전날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하며 한국(부산)의 사상 첫 세계선수권 유치(2020년)를 이끈 유승민 IOC위원은 2일 열리는 ‘ITTF(국제탁구연맹) 재단 창립 기념식’에서 남북의 여자선수 4명이 서로 섞여 연합팀으로 복식경기를 하는 특별이벤트를 제안했다. 토마스 바이케르트 ITTF 회장이 이를 받아들여 2일 오후 8시 현지 한 호텔에서 두 조의 남북연합팀이 급조돼 이벤트를 훌륭하게 치렀다. 남북한 관계자와 ITTF 주요인사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은 1일 예선 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고, 북한은 2일 16강에서 러시아를 꺾으며 3일 남북맞대결을 만든 상황이었다. 유승민 위원, 주정철 북한탁구협회 서기장, 바이케르트 회장, 박창익 전무 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눴다. 좋은 분위기로 인해 행사가 길어지면서 밤이 됐고, 다음 날 오전에 열리는 남북한의 경기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바이케르트 회장이 “남북이 탁구를 통해 이렇게 하나가 되니 정말 좋다”고 말하자 주정철 서기장이 “좋기는 한데 바로 내일 아침이면 서로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반응했다. 이에 바이케르트 회장은 “그럼 경기하지 말고, 한 팀이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툭 던져진 이 말은 관계자들의 표정을 바꾸며 진지하게 일을 추진하게 됐다. 유승민 위원은 “(이번 단일팀은) 공식적으로 남북한과 ITTF, 3자가 공동 추진한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굳이 따진다면 바이케르트 회장의 원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 토대는 유 위원이 놓고.
대회 도중 단일팀? ‘갑툭튀’였던 아이디어는 곧 설득력을 얻었고,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남북한은 각각 본국으로 연락해 승인을 받기로 했고, 바이케르트 회장은 “최대한 협조하겠다. 다른 나라들을 설득하겠다. 참가국 중 단 1개의 국가라도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때가 현지시간 밤 10시경. 한국은 새벽 5시였다.
8강전 대신 단일팀을 선언한 남북한 대표팀이 경기장에서 밝은 표정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ITTF.COM]
7시간의 핑퐁 ‘스웨덴-서울-평양’
한국시간으로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까닭에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 통일부, 청와대까지 연락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한국에서는 이유성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이 발 빠르게 움직였고, 주무부처도 특별사항이라면 신속하게 대응했다.
박창익 전무는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하면서 한국과 연락을 취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한과 ITTF는 당초 현지시간으로 새벽 4시(한국시간 오전 11시)까지 결론이 나지 않으면 포기하기로 했다. 대응할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ITTF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4시가 넘도록 북한은 물론, 한국에서도 확답이 오지 않았다. 밤을 새며 노력한 아쉬움이 느껴져 남북한은 1시간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4시40분께 먼저 한국에서 OK사인이 왔다. 그리고 기적처럼 5시께 북한에서도 “추진하라”는 승인이 떨어졌다. ‘이게 되는구나!’ 일을 추진한 남북한 탁구인들은 자신들이 벌린 일에 스스로 놀랐다.
단일팀 발표 직후 경기장에서 세계 주요언론을 상대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북한의 선수들. [사진=유승민 IOC위원]
3일 오전 8시 ‘전 세계의 승인’
그렇다면 이제 실무였다. 박창익 전무와 주정철 서기장이 마주앉아, 세부사항을 논의했다. 팀명칭과 관련해 이견이 있었지만 곧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사례를 준용해 ‘KOREA’로 표기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단일팀 구성에 따른 선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국 5명, 북한 4명이 참가하고, 메달은 선수 모두에게 주어기로 했다. 국기는 한국과 북한 기를 공동으로 게양하고 유니폼은 새로 제작할 시간이 없어 현재의 유니폼을 그대로 입기로 했다.
스포츠에서 공정함은 생명이다. 한 팀에 최대 5명이 룰인데, 갑자기 서로 경쟁하던 두 팀이 한로 합쳐 9명을 만들어 경기를 한다고 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바이케르트 회장이 참가국에 이 안건의 승인을 요청했을 때 한 나라도 반대하지 않았다. 남북한과 ITTF는 물론이고, 모든 참가국, 그러니까 전 세계가 ‘대회 도중 단일팀’을 축복한 것이다.
3일 오전 10시 ‘맞대결 대신 한 팀’
그야말로 깜짝쇼였다. 선수들은 전날부터 남북 임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최종 확정 통보를 받은 것은 경기시작 시간 30분 전이었다. 경기장에 입장했고, 장내아나운서의 멘트가 나왔다. “남북한 두 팀은 8강 경기를 치르지 않고, 하나가 돼 4강에 함께 올라간다”고.
영화로도 제작된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의 탁구 단일팀이 27년 만에 다시 만들어졌다. 당시는 4개월 전 미리 결정돼 46일간 합숙훈련을 했지만, 이번에는 탁구 종목 특유의 순발력으로 현장에서 해냈기에 더욱 뜻깊다. 그 과정에서 전 세계의 축하를 받은 것도 업그레이드 사항이다.
제2기 탁구 단일팀은 한국에선 전지희, 유은총(이상 포스코에너지), 서효원(한국마사회), 양하은(대한항공), 김지호(삼성생명)가 출전한다. 북한에서는 에이스 김송이를 비롯해 김남해, 차효심, 최현화가 나선다. 누가 경기에 나설까?안재형 감독은 “정말 고민이니 묻지 말아주세요. 끝까지 고민하겠습니다”라고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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