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종전은 폐허로 귀착됐지만 한편으론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백지상태, 제로에선 무엇이나 가능했다. 그래서 런던에 망명 중이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독일0년’이라는 말을 만들었고 로셀리니는 이 말을 자신의 영화에 차용했다.
0년/이안 부루마 지음, 신보영 옮김/글항아리 |
1945년이라는 한 해를 대상으로 세계사를 써내려간 ‘0년’(글항아리 펴냄)은 아시아 연구자로 이름이 높은 저널리스트 출신의 이안 부루머 뉴욕 바드대 교수의 역작으로 그는 현대문명과 상처의 뿌리가 이 곳에 닿아있다고 본다. 그의 탐색은 네덜란드 출신의 아버지의 전쟁체험에서 시작된다. 독일로 끌려갔다가 종전 직후 연합국의 폭격과 기아, 소련병사에게 처형될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귀향한 얘기다. 그런 전쟁담은 도처에 있었고 특별한 게 아니란 사실에 그는 국제적인 관점으로 시야를 넓혀간다.
저자는 종전 뒤에 따라온 해방 콤플렉스, 연합국과 점령지 혹은 회복한 땅의 여성들과의 친교, 기아와 보복, 성적 해방, 귀향, 매국노 처벌 등 당시 각 지 혼란의 사회상을 다각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전범 재판의 불완전성, 평화와 인권, 야망의 문명화 등 논란이 많은 주제들도 정면으로 마주한다.
현대사의 결정적 시기를 이념적이거나 지나치게 개인적이지 않은, 바꿔말하면 도시의 스트리트나 마을 어귀 정도에서 바라보는 적당한 거리의 시선 덕에 독자들도 사진 감상하듯 한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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