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환대 시원찮다’는 구실 붙여,
軍, ‘석달마을’ 빨갱이 몰아 무차별 총격
127명 중 부녀자, 어린이 등 86명 학살
채의진의 진상규명,정희상 기자가 출간
4.3 달랜 올해,4.28 문경축제 남다른 의미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남쪽 지방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에 가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가장 선호했다. 서울 가는 큰 고개는 세 개 였지만, 어감 때문에 문경새재를 택했다.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데,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 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는 것.
백두대간 지맥 사이로 한강과 낙동강을 거느린 천혜의 자연 경승지이기도 하다.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해 임금님 용안(光)을 보는 것(觀), 즉 관광(觀光)을 하기에 참 기분 좋은 곳이었다. 여행을 뜻하는 관광은 바로 그 ‘관광’에서 비롯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4월말 축제가 열릴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
조선시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과 문경 드라마촬영장엔 요즘 상춘객들이 몰리고 있다. 오는 28일 부터 5월 7일까지 이곳에선 문경전통찻사발축제가 열려 국내외 관광객으로 붐빌 것이다. 온 김에 문경 레일바이크도 타고, 지프라인 레포츠, 보양온천욕도 즐길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문경엔 ‘제주 4.3’ 같은 슬픈 이야기가 있다. 겨울에 벌어진 주민학살 사건인데, 늘 ‘제주 4.3’ 추념일이 다가오면 비슷한 상처를 입은 문경 사람들도 많이 아프다.
석달마을 양민학살 사건은 1949년 12월 24일 국군 2개 소대 병력이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당시 24가구 127명 거주)에서 주민들을 집합시키고는 ‘공산주의자에게 협조했다’는 누명을 씌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 86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일이다.
나중에 조사한 결과, 군인들이 자신들을 대하는 주민들의 환대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자, 아무 근거없이 ‘빨갱이 마을‘로 지목해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확인 사살을 면하고, 형님의 시신 밑에 깔렸던 채의진 소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졸지에 가족 9명을 잃고 고아가 되다시피 한 채의진은 역대 정권의 사건은폐 속에 한을 품은 채 중고교 영어교사가 됐다가 그만두고 진상규명에 일생을 바친다.
그는 1980년대 말 영문으로 석달마을 학살 사건 보고서를 작성해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학살 사건이 해결되는 날까지 머리와 수염을 자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빨간 베레모를 쓴 역사바로세우기 전사가 되어 문경학살 진상규명 뿐 만 아니라 억울한 학살현장 어디든 달려가 왜곡과 은폐에 맞서 싸웠다.
채의진의 진상규명 노력은 정희상 탐사전문기자에 의해 기록됐다. 과거사 위원회의 국가배상 결정을 받아내고 청구인들에 한해 배상도 받아냈지만 그 후 국가가 소멸시효 만료 등을 이유로 배상금 일부를 회수해 가기도 했다. 국가의 이런 조치에 대해 법원이 엄중 경고하는 판결(2009다66969 손해배상)을 내리기도 했다.
채의진의 문경학살 진상규명 여정이 그가 2016년 6월 숨진 지 20개월만에 책으로 나왔다.
‘채의진 평전-빨간 베레모’(정희상·최빛 지음) |
‘채의진 평전-빨간 베레모’(정희상·최빛 지음/시사인북 펴냄/312쪽)는 오랫동안 이 땅의 억울한 죽음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정희상 기자가 지칠 줄 몰랐던 인권 투사이자 오래된 친구를 위해 쏘아 올린 엄숙한 예포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삶이 어제의 그것보다 조금은 나아졌다면, 그는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석달마을에서는 매년 학살 피해자 합동위령제가 열린다. 경북이 아니었다면 더 일찍 진상규명의 목소리를 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69년 전의 참사인데, 올해로 합동위령제는 25번째이다. 서슬퍼런 메카시즘의 악령때문에 44년간 입막음을 당했던 것이다. 이곳을 텃밭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이 더 모질게 대했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2018년을 사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들은 제주 4.3 영령에 이어 문경 86위 영령에도 깊은 조의를 표한다. ‘제주 4.3’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된 2018년, 4.28 문경의 전통 축제도 여느해 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abc@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