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기해년((己亥年)이다. 12간지 중 가장 끝에 있는 돼지띠에 해당한다. 명리학은 띠에도 색깔을 입히는 규칙이 있단다. 기(己)는 누런색을, 해(亥)는 돼지를 상징하기 때문에 ‘황금빛 돼지’해가 금년이라는 것이다. 60년 만에 돌아왔다고 역술인들은 말하고 있다.
돼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다. 새해를 맞으며 모두가 넉넉하고 푸근한 한해가 되길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새 달력을 걸고 전화로, 문자로 새해 덕담을 나누거나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산으로 바다로 달려가기도 한다. 모두가 ‘금년에는...’으로 시작하는 옹골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을 것이다. 작심삼일이 될지 몰라도.
매년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설렘으로, 희망으로 새해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금년은 달랐다. 빈 도화지 상태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하겠다거나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없다. 그저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느낌뿐이었다. 나이 탓일까? 김형석, 김동길 교수는 100세가 넘고 구순을 훌쩍 넘겨도 책을 쓰고 강연 다니고 봉사활동을 하신다는데...
제법 오랜 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해 온 라틴어 격언이 있다. lente festina(렌테 페스티나). 직역을 하면 ‘천천히 빨리’인데 난 ‘서두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로 해석하고 있다. 한창 라틴어를 배울 때 얻어들은 글귀인데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요즈음엔 한발 더 나아가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하지 말자’로 확대해석을 하고 산다. 쫓기듯 살지 말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을 만드는 ‘전략적 빼기’를 하곤 한다. 이렇게 살면 훨씬 풍요롭고 여유있는 일상이 된다. 늙은이가 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자찬하면서 게으름을 즐기기도 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흰 머리카락과 주름이 있다고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는 그저 오랫동안 존재했을 뿐 오래 산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윤리적이고 충만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그저 막연히 시간만 보낼 것이 아니라 나를 완성하고 채워야 삶이 윤택해 지는 것이 아닐까! 중용(中庸)에서도 신독(愼獨)을 적극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스스로, 혼자 있을 때 나를 다스리고 가꾸고 완성시키려는 작업에 진력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성숙함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스스로를 채우는 일은 다른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운이 온다는 황금돼지 해이지만 정치는 혼란하고 경제는 걱정거리가 산적해 있고 사회는 불안하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거겠지만 이런 어려움을 몸으로 이겨야 하는 우리에겐 조금은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담박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차근차근 하루를 메워 나가면 금년도 거뜬히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본다. 너그럽고 여유있게 살고 그렇게 나를 다스리자고 다짐한다. 새해니까.
박영상 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