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 밀양박씨 청재종가 남파고택
남파고택의 모습. 왼쪽은 경내 9개 전각 중 가장 먼저 지어진 초당 |
고려시대 왕의 행궁역을 하던 금성관에서 남쪽으로 나주곰탕거리를 지나 2~3분만 걸으면 나주천변에 남파고택이 있다. 나주 밀양박씨 청재종가인 이곳은 국민 놀이터가 됐다. 다시 적당한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몇달전까지만 해도 문화유산 향유 ‘헤리티지-테인먼트(Heritage-tainment)’로서 각광을 받던 곳이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대국민 활용 프로젝트의 종가-고택 부문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남파고택 등 영호남 3개 종가 사람들을 시상했다. 남파고택 시간여행은 전통 내림음식 등 종갓집의 전통생활문화, 나주읍성 역사문화 등을 엮은 ‘명사와 함께하는 고택 스테이’였다.
고려말 박침은 군부 일각의 조선 건국 움직임에 저항해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로 개경의 심산유곡 두문동에 은거한 ‘72현’중 한 명이고, 그의 손자 박심문이 청재공파를 열었다.
박심문도 충절의 선비였다. 조선 문종의 신임 속에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을 받은 박심문은 수양의 유혈 쿠데타가 성공하고 생·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끝내 실패하자, 자신도 음독 순절한다.
19세기들어 남포고택 주인들은 저장성 높은 곡물의 증산 등 포트폴리오 다변화, 소없는 농가를 대상으로 한 ‘소(牛)렌트시스템(우도경영)’으로 농업구조혁신을 이뤘고, 박재규는 1903년 가뭄이 들어 가격이 폭등하자 벼와 씨앗 수백석을 쾌척, 곡물유통의 숨통을 텄다. ‘쓰기위해 모은다’는 가훈을 실천한 것이다. 소작농에게 소를 나눠주고 송아지를 낳으면 무료 분양으로 자립을 도왔다. ‘생산적 복지 나눔’의 전형이다.
일제시대 남포고택 주인들의 항일 경제독립투쟁은 새로이 조명되어야 한다. 박준삼은 신간회 나주지회를 주도하고, 매판자본의 산업독점 가격교란에 대응해 ‘나주협동상회’을 설립, ‘조선인 생산자-소비자’를 잇는 유통 자주권을 실행한다. 도정(搗精)기계 혁신과 신식 정미소 보급, 제재소 운영, 삼베 등 특용작물 판권의 확보 등 경제침략의 길목을 차단했다. 나아가 학교도 세웠다.
남포고택 주인들을 비롯해 남도종가 상당수가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방법은 단순히 총칼만 쥔게 아니라 경제무기를 겸장했고, 백년대계까지 세웠기에 우리의 항일역사는 다시써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