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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아물지 않은 상처' 5ㆍ18을 말하다
엔터테인먼트| 2011-05-18 10:29
비극은 아름답게 반짝이던 눈 부신 하늘 아래 찾아왔다. 가장 밝게 빛나는 봄날의 일이다.

어느새 31년을 지나왔다. 시간은 모든 빛깔을 퇴색하게 만들지만 그날은 무수한 기억 속에서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역사는 상처에 또다시 상처를 입히기에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진실만이 유일한 처방전이 된다.

지독히도 정치적이었던 ‘5월의 광주’에는 어미의 손을 놓치고 만 어린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연인과 마주 앉아 나눠먹던 자장면 한 그릇 위로 어둔 그림자가, 손장난을 치며 높은 음성으로 재잘대던 여고생들에겐 무덤같은 침묵이 드리워졌다. 우리가 보아온 영화에서다. 

스크린에서 5.18은 이렇게 나타났다. 영화 ‘꽃잎’에서처럼 깊은 상처를 맨눈으로 응시해야 했고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정치적 사건 아래 놓인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을 담담히 지켜봐야했다. 기억 속의 이들에겐 현실 못지 않은 참담함이었으며 활자 안에 박제된 역사로만 남은 이들에겐 현실보다 아린 기록이었다.

▶ '정치적 사건' 아래 놓인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화려한 휴가'=영화의 제목은 5.18 당시 군부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운)’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광기 어린 ‘꽃잎’에서와 같은 묘사는 배제한 채 ‘화려한 휴가’가 보여준 것은 교과서 안에 잠들고 있던 과거를 일상으로 되돌린 것이었다. 5월 18일부터 열흘간 광주의 한 가족들의 일상을 다룬 영화였다. 논란과 논쟁은 묻은 채 인간적인 묘사를 통해 써내려간 화려한 휴가에 당시 관객들은 연민을 보냈다.


영화의 개봉 시기는 다만 정치권에서 이색적인 해석을 가져왔다. 2007년 7월 25일, 대선을 넉 달 앞둔 시점 극장가에 내걸렸던 ‘화려한 휴가’를 두고 여의도에선 말이 많아진 것. 범여권은 자신들이 민주화운동의 적통임을 내세우며 야권을 공격했다. 야권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5.18을 소재로 했으면 5월에 개봉해야지 왜 7월에 개봉하느냐’면서 이는 ‘미디어작업’이라고 경계했다. 동(動)한 관객의 정서에 맞물려 당시 ‘화려한 휴가’가 500만명을 돌파하면 무조건 범여권 후보가 이긴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영화는 500만을 가뿐히 넘어 730만을 찍었으나 당시 대선에서는 설(說)과는 다른 결과로 마무리됐다.

▶ '꽃잎'과 '박하사탕'...맨눈으로 마주한 상처=영화 ‘꽃잎(감독 장선우)’과 ‘박하사탕(감독 이창동)’은 5월의 광주가 안고 있는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 개봉한 영화 ‘꽃잎’은 가수 겸 배우 이정현의 데뷔작이었다. 이 광기어린 소녀는 광주 그 자체였고, ‘광주의 5월’이었으며 ‘5월의 그 날’이었다. 

이정현이 연기하는 깡마른 소녀에는 소녀의 것 같지 않은 참담함이 배어있다. 소녀의 가슴엔 죽어가는 엄마를 외면한 채 달음질친 5월 그 악몽이 깊이도 새겨있다. 영화는 5.18을 소재로 했으나 소녀를 중심에 내세운 성 메타포가 극을 이어나가는 고리가 되고 있다. 상처입은 무기력한 소녀를 학대하는 인부 장(문성근)에게선 소녀가 품은 상흔을 찾아볼 수 없다. 카메라가 들이댄 광주는 어린 소녀를 통한 고통스러운 상처로 남은 영화였다. ‘꽃잎이 지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라는 가사의 노래 ‘꽃잎’처럼 말이다.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감독 이창동)’의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였다. 그것은 죽음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이 남자(영호, 설경구)가 철로 위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더듬거린다. 

언뜻 평범하고 때로는 비루하고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 남자의 20년에는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헤어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5년 전에는 가구점 사장, 12년 전엔 형사, 1980년 광주에서는 전방부대에 배치된 신병이었다. 광주에서 한 소녀를 향해 총을 겨눴던 남자를 그려가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신참형사의 모습을 그렸으며 군시절 첫사랑과의 애틋함을 담았고 바람난 아내를 폭행하고 누군가를 찾아 정사를 벌이는 닳고 닳은 남자의 삶이 담겼다. 이 모든 것이 찬란한 5월 광주에서의 비극으로 인해 빚어져있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담아낸 영화다.

▶ 5.18을 말하는 목소리...시작은 1980년대부터=5.18을 소재로 한 영화는 알려진 상업영화 외에도 곳곳에 숨어있다. 많이 대중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억할 만한 작품들이 많다. 특히 그 시작은 광주의 상처를 쉽사리 드러낼 수 없었던 1980년대부터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 만하다.

영화 ‘부활의 노래(감독 이정국)’는 5.18을 소재로 한 최초의 극영화로 광주항쟁을 전후해 야학을 이끌었던 실존인물들의 삶을 그려나가고 있다. 광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금기시된 광주의 이야기는 미완으로 남았다. 이후 영화는 민주화에 몸을 던지는 청년들의 이야기로 완성돼 제 3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감독상을 받게 됐다.

1987년 개봉한 김태영 감독의 ‘칸트씨의 발표회’는 광주항쟁 때의 실종자 칸트씨와 그를 우연히 만난 사진작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35분을 채워간다. 김태영 감독의 또다른 단편 ‘황무지’ 역시 같은 소재로 궤를 같이 하고 있다.


1989년 개봉한 ‘오!꿈의 나라(감독 이은 장동홍 장윤현)’는 5.18민주화운동이 무력으로 진압된 이후 의 이야기를 다뤘다. 광주의 일 때문에 여전히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 광주의 기억이 피딱지가 된 채 이어지는 삶, 그로 인해 현실에서 괴리된 채 살아가는 이야기다.

박광만 감독은 5.18민주화운동을 오롯이 광주 시민의 시각에서 다룬 저예산 독립영화 ‘순지’를 찍었다. 2009년이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영화는 당시까지 제작 상영된 5.18 관련 영화와는 달리 오로지 광주의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광주의 영화’라는 점과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혼재한 형식이다. 영화는 광주를 방문한 주인공 순지가 옛 전남도청 앞에서 5.18전야제에 참가하는 과정을 전야제에 참여한 실제 광주 시민들과 당시를 재현하는 현장 속에 주인공들이 들어가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 살아남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월愛’(감독 김태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날 광주에 존재했던 사람들, 그리고 30년 뒤의 일상을 그려간다.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다. 꽃잎처럼 스러지던 어린 소녀와 함께 했던 또다른 소녀, 군화에 짓밟히던 어느 청년을 바라보고 무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위해 주먹밥이라도 만들어 먹여야했던 여인, 시민군을 싣고 금남로를 달리던 버스기사, 당시의 광주를 사진으로 남겼던 기자 등 그 날 그 자리의 사람들의 현재를 돌아본 것이다. 

제작진은 60여명의 광주 시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엮었다.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아픈 기억이기 때문에 5.18민주화운동은 여전히 박제될 수 없는, 낫지 않은 상처인 것이었다. 그 날 이후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기에 가지게 되는 자책과 참혹한 시절을 지나 찬란한 날을 맞아 이제는 유공자라는 이름을 품은 그들의 이유와 그들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덧나버린 상처를 담담히 바라보는 이 영화는 가장 최근의 개봉작이다. 5.18을 엿새 앞둔 5월 12일 개봉했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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