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사지선다 암기형 학력고사의 마지막 세대이다. 1962년부터 1993년까지 10년 넘게 이어진 대입 시험이다. 이른바 ‘학고 세대’. 쉬웠다 어려웠다, 이 제도, 저 제도를 섭렵하는 와중에, 합격률을 높여야 하는 고3 담임 선생과 명문 학교에 보내려는 학부모 사이의 대학 지원서를 놓고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또 ‘어학연수 1세대’이다. 80년대 후반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커지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가 됐다. 당시 해외 이민이 많았으며, 이후 영어 실력이 취업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면서 어학연수를 떠나는 대학생이 많았다. 아울러 토익(TOEIC) 시험이 입사전형요소가 되면서 영어 실력의 바로미터로 자리잡았다.
생산, 근검 만큼이나 ‘소비’가 미덕으로 자리잡는 첫 세대이기도 했다. 산업화의 열매를 처음으로 향유했으며, 87년 이후 민주화도 어느정도 진척되면서 다양한 소비에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당시 대학에는 외국 담배에 대한 저항감이 많았는데, 이도 조금씩 무뎌지며 말보루, 마일드세븐 등 외제담배를 피우는 학생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우리의 국격을 높이기도 했지만, 근검시대와 소비시대를 구분짓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F세대는 ‘소비시대’의 첫 소비자였던 것이다.
‘PC통신’도 빠트릴 수 없는 F세대 용어 가운데 하나.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을 통해 전국에 있는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열광했다. 이런 까닭에 이들은 PC 앞에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으며, 다양한 온라인 동호회 활동의 출발이 됐다. 이런 문화가 이후 인터넷을 통해 더욱 확대됐으며, 지금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세계사적으로는 91년 ‘소련(Soviet Union)의 붕괴’가 이들의 이념 지표를 흔들었다. 80년대 중반 학번들로부터 직ㆍ간접적으로 비판적 성향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소련이 몰락하면서 기존의 운동권 이념을 부정하게 된다. 결국 F세대는 포스터 모더니즘적, 탈이념 다원주의, 문화주의로 다양한 삶의 무기를 갖추게 된다.
F세대 부터 겪기 시작한 취업난은 오늘날 ‘캥거루 세대’의 신호탄이 됐다. 성인으로서 학교를 졸업했으면서도 부모의 품 속에서 당분간 더 자랄수 밖에 없는 처지는 그들 스스로 만든게 아니었다.
경기에 따른 인력 구조조정이 가능해지는 쪽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40세 안팎의 이들 세대도 ‘사오정(45세 정년)’, ‘삼팔선(38세 은퇴)’ 등의 신세에 내몰리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를테면 금융구조조정 당시, 서른 갓 넘긴 나이에도 은행에서 자의반 타의반 퇴직해, 창업투자사, 부띠끄, 투자자문회사를 차린 젊은 금융인이 적지 않았다.
이 밖에도 이들 세대의 단면을 드러내는 키워드는 많다. 2002년, 2004년, 2008년 ‘촛불집회’에 이들은 30대 또는 40대 가장이면서도 집회 현장을 찾곤했다. ‘키보드’에 익숙한 세대이지만, ‘큰 마당’이 만들어지면 마음속 응어리를 푸는 장소로 활용했다.
영어에 친숙한 어학연수 1세대 답게 영어로 된 용어들도 그들의 여정을 둘러싸곤 했는데, 인터넷(Internet), 벤처(Venteur) 등은 F세대가 주도하던 키워드였다. 벤처붐이 꺼지면서 쪽박을 찬 F세대도 적지 않았다.
<박도제 기자 @bullmoth> pdj24@heraldcorp.com
1987년 전국적으로 벌어진 6월항쟁 1년 뒤엔 88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선진국 진입에 들떠있던 이 시기 청년기를 맞은 F세대는 올림픽후 조성된 ‘소비시대’의 첫 주인공이었다. |
청년기부터 고단한 20년을 보낸 F세대는 키보드로 뜻을 공유한뒤 마당이 만들어지면 ‘촛불집회’라는 형태로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다분히 전략적이고 일사불란한 대오를 형성하던 386 운동세력과는 달리, 명확한 정세판단과 뚜렷한 목표를 갖지는 못했다. <헤럴드 디지털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