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실 저축은행엔 가차없이 메스…취미는 만화 보기·장난감 수집하기…김석동의 진짜 모습은
일 많다고 소문 자자한 재무부서 14년7개월 사무관 생활
외화자금과장으로 승진한지 이틀만에 터진 외환위기
환란 주범이라며 검찰에까지 불려나갔지
3번의 대수술 뒤 이민 결심…그런데 속에서 꿈틀대던‘ 공익DNA’
돌이켜보니 공무원 된 뒤엔 불평 한 번 한 적이 없었지
필요할 때 등판해 최선 다해 던지고 내려온 최동원 선수처럼
공무원이라면 국가를 위해 그래야 하지 않을까
대개 스타급 인물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이면에 궁금한 것이 많게 마련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만 알려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강한 인상으로 알려진 인물일수록 더욱 그렇다. 대우그룹을 해체했고 지금은 피 튀기며 부실저축은행을 정리 중인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만화 마니아에다 독특한 장난감이라면 악착같이 수집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승승장구 하는 줄만 알았던 그 역시 인사에서 속칭 물먹은게 한두 번이 아니며 다 집어치우고 이민 가려고 짐을 꾸리기도 했다. 덜컥 집을 팔았다가 부동산 업자 말만 믿고 되살 기회를 미루는 바람에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얘기를 나눌수록 궁금증이 많아지는 인간 김석동이다. 그게 휴먼다큐 지면으로 초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초고속 승진이요? 물먹은 적 많아요”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초고속 승진’이란 말에 손사래를 쳤다. 그도 그럴 만하다. 그는 아마도 정상적인 행정고시 출신으로는 가장 오래 ‘사무관’에 머문 공무원 중 한 명일 것이다. 장장 14년7개월이다. 그것도 줄곧 그 일 많다는 재무부에서다.
그가 묵묵히 일만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53년생인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같은 또래보다 3~4년 정도 늦게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었으니 더 열심히 할밖에. 그는 나이나 학교로 보면 17회 18회 하고 동기지만 행시는 23회다.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김용환 수출입은행장 등과 동기지만 같은 나이대 동료들은 행시 17~18회로 한참 선배였다.
“행시가 늦었으니 비슷한 연배들과 차이가 많았죠. 결국 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늘의 뜻이었을까. 그가 굳이 일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일이 몰려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일이 터졌다. 5ㆍ8 부동산특별대책반장(1990년), 금융실명제대책반장(1993년), 부동산실명단 총괄반장(1995년), 금융개혁법안대책반장(1997년).
“심지어 제가 재정경제원 국제금융국 외화자금과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역대 없었던 일(외환위기)이 생겼어요. 누가 농담 삼아 ‘김석동만 없으면 일이 안 생기니까 자리를 좀 비워주면 안 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 많은 굵직한 일들을 처리해 내고도 그는 인사에서 별로 큰 혜택을 보지 못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된 재정경제원의 외화자금과장으로 승진했을 때는 외환위기가 터져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
시련의 시기는 몇 년간 지속됐고 역설적으로 2003년 국내 금융시장을 뒤흔든 ‘신용카드 대란’이 그를 다시 살렸다. 정부는 대책반장이 필요했고 결국 그를 다시 불렀다.
그 이후 막혔던 승진운이 터지기 시작했다. 옛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1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4개월, 차관보 1년6개월,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4개월, 재정경제부 1차관 1년. 숨가쁘게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공직생활의 뒷부분만 보면 초고속도 아니다. 어질어질할 정도의 초음속이다.
▶“나에겐 공익 DNA가 있다”
김석동 위원장 인생사의 최대 위기는 환란이다. 동시에 환란이 오늘날 그를 있게 한 계기가 됐다는 건 아이러니다.
“97년 환란 이후 나를 찾는 곳이 정말 많았어요. 환란의 주범이라고. 대검 중수부 수사받고 법원 증언 나가고 감사원 감사받고 OECD에서도 불러서 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대책을 마련하자니 6개월을 하루 2시간씩밖에 못 잤어요.” 나중에 세 번의 대수술을 받는 원인이 됐을 만한 일을 겪고 나니 모든 게 덧없었다. 범죄자 취급을 받아가며 이렇게까지 공직을 유지해야 하나 싶었다.
“공직을 그만 두려고 했어요. 나가면 오라는 데도 있었고.”
그는 모든 걸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 갈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가까운 친척들까지 참석한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지으려 했다. 회의는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모두들 말이 별로 없었죠. 원하면 그렇게 하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근데 아내가 한 마디 해요. 당신 삼성물산 다닐 때나, 개인기업할 때는 집에 오면 늘 불만뿐이었다. 하지만 공무원 되고는 훨씬 더 일 많고 매일 새벽에 들어오면서도 한 마디도 투덜대지 않더라. 이러는 거예요. 아! 이거구나 싶었죠.”
그가 말하는 공익 DNA다.
“내겐 선천적으로 공익 DNA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잣대로 하니 사업이나 일반기업에 개인회사에 맞질 않죠. 돈 잘 벌어도 만족감이 없었어요. 근데 공직에 와서 보니 이게 딱 맞는 겁니다.”
그때 공무원이 천직이란 마음을 다시 굳힌다. 그리곤 결심한다. “내가 위기를 만들었으니 대한민국이 다시는 이런 위기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 그게 앞으로 내 목표다.” 그 후 다시는 때를 놓치지 않는다. 터지기 전에 먼저 문제를 꺼내고 수술한다. 요즘 외화건전성, 가계부채, 저축은행 문제 등에 한발 앞서 메스를 들이대는 이유를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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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책반장이란 어떤 의미에선 수술하는 의사다. 도려내고 꿰매야 한다. 그래서 누구에겐 저승사자요 누구에겐 구세주다. 그런 역할을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시로 맡는다는 건 보통 강단으로는 불가능하다. 김석동 금융위원장 그를 지탱해주는 강단은 공익 DNA다. 기발한 발상을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건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
▶지구를 깨물어 보리라
그가 처음부터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무역업을 하는 삼성물산이다.
“삼성물산에 1년쯤 있으니 어떻게 주문하고 수출하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잘하면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고 고액 연봉을 받으며 편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동시에 나를 위해서만 살아서 되겠냐는 고민에도 빠졌어요. 결국 내 회사를 통해 사회에 보답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는 지구를 깨물겠다고 할 만큼 에너지가 넘쳤어요.”
공익 DNA는 그때부터 꿈틀대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주저없이 사표를 썼고 지체없이 회사를 차렸다. 주제실업. 가죽 원단을 수입해 점퍼를 만들어 해외에 수출했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어깨선 봉제 기술을 갖고 있었다. 잘 나가던 회사는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유동성 위기를 맞는다. 돈을 빌리려고 은행에 갔지만 차마 온 가족 연대보증까지는 할 수 없어 회사 문을 닫는다. “당시 연대보증이 없으면 어떤 회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주제실업을 세운 지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집을 팔아 깨끗이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이는 금융위의 금융정책 목표 중 하나로 ‘중소기업 연대보증 폐지’를 내세운 배경이 됐다.
그는 금융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기 전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를 지냈다. 공무원보다 생활은 여유롭고 윤택했지만 당시를 회상할 때면 꼭 ‘놀았던 때’라고 한다. 그에겐 언제나 공직생활만이 ‘일할 때’인 셈이다. 몸속의 공익 DNA가 요동치는 건 그때니까.
▶김석동과 최동원
지난해 9월 작고한 야구 선수 최동원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다. 김 위원장의 언론 인터뷰엔 빠짐없이 최동원이 등장한다. 사실 두 사람은 고향(부산)만 같을 뿐 특별한 인연이 없다. 김 위원장이 공직생활 30년을 최동원 선수와 함께하는 이유는 뭘까.
“최동원은 최고의 투수는 아닙니다. 방어율만 보면 최고는 선동열 선수죠. 그런데 감독은 최동원 같은 선수를 더 선호합니다. 필요할 때면 꼭 등판해 씽씽 던지고 내려오는 거죠. 자기 팔이 혹사되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거죠. 저도 그런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초기인 1984년 9월. 최동원 선수가 소속된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창단 첫 우승을 노렸다. 투수진이 약했던 롯데는 최동원 선수를 무려 5차례(1, 3, 5, 6, 7차전)나 마운드에 내보냈다. 누가 봐도 무리수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최동원은 팔에 마비가 와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던졌다. 결국 혼자 4승을 거두며 롯데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고, ‘불멸의 에이스’, ‘무쇠팔’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김 위원장의 머릿속에는 그 시절 최동원 선수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있다.
“국가 경제를 흔드는 비상 상황이라도 위에서 그걸 맡아 처리해 달라고 지시하면 누구나 피하고 싶죠. 솔직히 저도 그래요. 경제적인 비상대책이란 게 성공 확률은 50%도 안 됩니다. 저보고 ‘일을 보면 불나방처럼 덤벼든다’고 하는데 아무도 맡지 않는 일을 저라고 왜 피하고 싶지 않겠어요? 그러나 공무원도 최동원 선수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소리 안하고 나와 최선을 다해 던지고 내려가야죠. 그게 공무원의 자세입니다.”
때문에 김 위원장은 후배 공무원들이 일을 잘못하는 것에 대해선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대신 공직자의 정신과 자세에 대해선 누구보다 철저하다.
“일에 대한 결과물이 좀 떨어지면 선배들이 봐주면 됩니다. 오히려 업무를 대하는 태도나 정신이 더 중요하죠. 이런 건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거든요. 저는 공직자로서 후배 공무원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습니다.
▶운명을 걸고 짜내는 기발한 발상
자세가 돼 있다고 누구에게나 일을 시키는 건 아니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가 대책반을 이끄는 키워드는 기발한 발상과 속전속결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목숨을 걸 만큼 열심히 집중하자는 의미다.
그의 업무방식은 단순하다. 일단 지시가 내려오면 대책반을 꾸린다. 평소 같이 일해온 직원들로, 사무보조 업무를 보는 직원도 포함된다. 이후 시내 한 호텔 방을 예약하고 팀원들을 불러들인다. 팀원들과 몇날 며칠을 동고동락을 하면서 대책을 만들어 보고한다. ‘오케이’ 승인이 나면 팀원들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해당 부서로 돌아가 본업에 열중한다.
“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업무 집중도가 높고 기동성이 좋습니다. 보안도 철저히 유지돼 긴급대책을 세우기는 안성맞춤이죠. 그러나 매번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입니다. 공무원으로서 운명을 걸고 하죠. 그래서인지 상상도 못하는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것 같아요.”
김 위원장은 외환위기에 책임을 지고 옛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과장으로 좌천됐다. 잠시 평범한 공무원 생활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감독정책1국장에 부임하자마자 다시 일이 터졌다.
‘2003년 신용카드 대란’. 대책반장 김석동이 돌아왔다.
“기존 해법으로 안 되니까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카드사 부실을 막기 위해 은행권에서 5조원을 차입하자는 아이디어는 당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죠.”
새로운 접근법이 금융시장에서 먹힐 때마다 대책반장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일은 끊임없이 몰려왔다. 2008년 2월 금융위기 그림자가 전 세계를 뒤덮을 때 그는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1차관으로 공직생활을 마친 뒤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로 물러났다.
▶거짓말쟁이 아빠 김석동
어느 조직에서 일하든 군대, 해외연수, 해외파견 등으로 잠시 쉬어가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이력서엔 바다냄새가 전혀 없다. 김 위원장은 휴가 이외엔 일만 했다. 아무리 공익 DNA가 충만하다 한들 원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30년 동안 꼼짝 못하고 일만 한 사람 별로 없을 걸요. 갈 기회도 있었고 가려고 했죠. 근데 그게 몇 번씩이나 동티나더라고요.”
해외연수의 기회는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 두 차례나 있었다. 스스로 포기했다. 이유는 하나. 급하게 할 일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그의 공무원상이다. 그는 해외연수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후배들이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박사지? 해외 한 번 못나간 본 나는 도사일세.”
자신이야 그렇게 웃고 넘긴다지만 식구들은 참 못할 일이었다.
“아이들을 설득하기가 제일 어려웠어요. 이미 친구들에게 미국 간다고 다 자랑해놨고 집사람도 동네 사람들을 모아 송별회를 하고 나갈 준비를 다 했는데 거짓말을 하게 된 거죠.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는 살던 집까지 팔았는데 출국을 며칠 앞두고 결국 못 가게 됐죠. 제가 가족에게 평생 빚을 진 겁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항상 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아이들에겐 자율을 줬고 아내의 말엔 항상 귀를 기울였다.
“저는 평생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는데 집사람과 아이들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항상 마음에 걸리는 일이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해줬습니다. 한 번도 뭘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죠. 물론 집사람도 동의한 일입니다.”
▶스스로 길을 찾은 아이들
그는 친누나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누이와 유독 친했던 그는 누이가 추천한 ‘참한 후배’에 금방 빠져버렸다. 마침 손아래 처남될 이가 학생이어서 과외를 해주며 무시로 처가(?)를 드나들 수 있었다. 서울대학생이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데야. 그리고 바로 결혼에 골인했다.
김 위원장은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율을 준 만큼 알아서 준비하리라 믿었다. 단 공직에 있는 이상 월급이 넉넉지 않으니 절대 해외유학은 보내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과외도 시키기 어려웠다. 잘 따라주는 아이들이었지만 불만이 없다면 그게 이상하다.
영화에 빠져있는 아들이 먼저 반기를 들었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프랑스로 가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아서 유학을 하겠으니 그냥 국내 대학다니는 학비만 달라는 것이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무엇보다 등록금이 공짜였다. 자취방을 구하는데도 국가에서 30%를 지원해줬다. 결국 김 위원장이 손을 들었다.
아들은 프랑스에서 석사까지 마쳤다. 지금은 동국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학비가 저렴한 대학교에 다녔던 둘째도 중국에서 6개월간 어학연수만 하고 돌아왔다. 김 위원은 가족들과 포도주 한 잔 하며 영화를 감상하길 좋아한다. 그가 앞으로도 자녀들에게 뭐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최진성 기자/@gowithchoi> ipen@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