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극도로 커지거나 작아지거나..서울에 온 테리안의 작품
라이프| 2012-04-26 10:13
하늘에 둥둥 떠있어야 할 뭉게구름이 갤러리 한 구석, 테이블에 얌전히 놓여졌다. 그런데 흰 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다. 무게도 자못 무겁다.

미국의 중견작가 로버트 테리안(Robert Therrien,65)의 작품 ‘무제’(일명 Black Cloud)다. 검은 뭉게 구름 세덩이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갤러리서미(대표 홍송원)에서 오는 5월 6일까지 열리는 ‘로버트 테리안 작품전’에서 만날 수 있다.

로버트 테리안의 작품 ‘무제’(Black Cloud)는 하늘의 거대한 구름을 아주 작게 축소해, 세개의 둥근 덩이로 표현한 것이다. 솜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구름을, 더없이 딱딱하고 무거운 조각으로 변환시킨 초현실적 시각이 흥미롭다. 형태는 풍만하고 부드럽지만 검은 빛깔이 곧 비라도 몰고올듯, 자못 의미심장하다.

가로 70cm 남짓의 이 조각은 벽에 걸 수도 있다. 벽에 걸린 딱딱한 검은 구름이라, 상상만 해도 그 엉뚱한 발상이 만화처럼 재미있다.



작가 로버트 테리안은 이렇듯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일상의 사물과 대상을 아주 크게 확대하거나, 아주 작게 표현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대상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시킨다는 점이다. 기독교 전통의 나라에서 무시로 접하게 되는 성당이며 교회 건물도 그 특징만 날렵하게 뽑아내, 삼각의 꼭지점이 하늘로 뾰족히 올라간 간결한 형상으로 압축됐다. 





테리안은 싸구려 식당에서 수프 등을 담아내는 민트빛 접시를 뻥튀기하듯 확대시켜 쌓아올리기도 했다. 지름이 1.37m(소재 플라스틱)로 커진 대형 수프접시 20개가 켜켜이 올려지니 그 높이가 무려 2.38m나 됐다. 접시들은 엉성하게 포개져 옆을 지나기가 은근히 겁 난다. 그 옆 갤러리 한구석에는 식탁 모서리와 다리 하나가 천장을 떠받들듯 위태롭게 설치돼 있다. 이같은 테리안의 대형 작품은 관객에게 친근함과 낯섦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것들이 주는 생경함, 그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


로버트 테리안은 1980년대부터 단순하고 명료한 형태를 지닌 주전자, 관, 탁자 같은 일상 사물을 청동 브론즈 나무 등 여러 소재로 재해석해내는 작업을 펼쳤다.

그의 작업에 사용되는 오브제들은 작가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작업에선 다소 사적인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작품 무제 (Black Cloud)는 이러한 초기작들과 연결되는 조각으로, 단순화된 구름은 검은 잿빛으로 표현돼 변덕스런 구름의 성질을 마치 만화처럼 표현하고 있다.


초기 그의 작업들이 커다란 대상을 작게 만들고,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담았다면, 1990년대 이후 그의 작업은 거대한 스케일로 변하게 된다. 작은 브러쉬를 거대하게 확장시킨 작품(‘무제(Scrubbrush)’)은 실제로 일상에 쓰이는 도구지만 그 실용적 기능을 넘어, 어떤 마법적인 기운마저 느껴진다. 미국의 중산층, 또는 서민층 가정에서 누구나 쓰는 야외피크닉을 위한 접이식 탁자와 의자를 초대형으로 확대한 작품 ‘무제(Table leg)’ 또한 마찬가지다.

테리안의 이같은 크기 확장은 대상 사물을 또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가정에서, 또는 사무실에서 너무 자주 써서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며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확대 또는 축소해 풀어낸 로버트 테리안의 작업은 초현실적 느낌을 받게 한다. 또 그 과정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고,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기회도 준다.

너무 대형으로 커져서 앉을 수 없는 의자, 쓸 수 없는 탁자와 접시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갤러리를 찾은 감상자들은 테이블과 의자, 접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 종국적으론 테이블과 의자의 ‘있는 그대로의 형태’와 그것이 주는 ‘물리적인 경험’에 집중하게 된다.


작가는 "각각의 사물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기억과 추억을 품고 있다. 나는 내 작업을 통해 이들의 숨겨진 서술적인 구조와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일상적인, 그래서 너무 쉽게 간과된 것들을 테리안은 물리적으로 새롭게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 그 사이의 연결관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1947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테리안은 현재 LA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데뷔초에는 단순하며,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오브제인 관, 주전자와 같은 것을 다양한 매체로 만들어 유명세를 얻었으며, 1990년대부터는 다이닝 테이블, 쌓아올려진 접시들을 거대한 크기로 만들어내며 스케일(Scale)을 실험하는 작업을 거듭하고 있다. 





테리안은 미국 LA현대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휴스턴 현대미술관, 가고시안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미국 뉴욕MoMA, 영국 테이트 모던갤러리,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 유수의 미술관과 개인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로버트 테리안의 한국 전시는 이번이 처음으로, 갤러리서미 1,2층 공간에는 작가의 대표작인 접시 설치작업(‘무제’)과 테이블 등을 비롯해 각종 조각, 오브제, 회화, 판화 등이 두루 출품됐다. 02)3675-8232



<글, 사진= 이영란 선임기자>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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