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반
“이 위기 또한 지나가리라”…벼랑끝에서도 미소가…
라이프| 2012-08-17 10:18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거리엔 문 닫은 상점들 즐비
그래도 노천카페엔 사람들 북적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아테네
광장 한쪽선 인원감축 반대시위
다른 곳은 거리축제 인파로 활기

“지금껏 수많은 위기 겪었지만
역사의 물줄기 안에선 한때의 과정”
그리스인 특유의 낙천성으로 극복


[아테네(그리스)=이해준 선임기자] 한참 잠을 자다 버스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눈을 떴다.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터키~그리스 국경에 근접하면서 속도를 늦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30분이다. 밤 10시 이스탄불을 출발한 지 3시간30분 만에 국경에 도착한 것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출입국 수속을 밟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유로존(유럽연합)으로 들어온 것이다.

중국~네팔~인도 등 아시아 지역에 이어 터키를 지나면서 여행에도 변화가 있었다. 4개월여 동안 함께 여행했던 중학교 3학년인 조카가 터키를 끝으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귀국했다. 터키에서는 승희 부모, 그러니까 필자의 형님 가족 및 동생 가족 등 모두 11명이 함께 여행을 했다. 터키 여행을 마치고 다른 가족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고 필자의 가족 4명만 남은 것이다.

좌충우돌과 모험의 연속이었던 지난 130여일의 여행 과정에서 조카는 많이 달라져 학교로 돌아갔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독립심을 키웠고 처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독자여행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그의 각오가 결실을 맺기 바라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11명의 대가족이 12일간 북적대며 여행하다 필자의 가족 4명만 남자 왠지 모를 허전함이 몰려왔다. 장기여행으로 인한 피로감도 몰려왔다.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 여행이 시작됐다.

밤새 마케도니아 지역을 달린 버스는 아침 7시30분 그리스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가 정차한 곳은 터미널이 아니라 ‘메트로’ 버스회사 사무실 앞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상가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스와의 첫 대면이 약간 황당하고 썰렁했다. 그런 느낌은 상당 기간 지속됐다.

그때 그리스엔 경제위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테살로니키도 그 직격탄을 맞은 상태였다. 그리스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장으로 2008년 경제위기가 몰아쳐 1차 금융지원을 받았으나, 이것으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바로 며칠 전 1300억유로의 2차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구제금융의 조건은 매우 엄혹해 이에 반대하는 시위로 몸살을 앓기도 했다.

그리스는 금융지원 조건으로 재정적자를 감축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억제해야 했다. 총 임금근로자의 20%를 차지하는 정부와 공공부문의 근로자 15만명을 감축하고 최저임금을 20% 줄이고 연금지출을 삭감해야 했다. 가뜩이나 위축됐던 경제는 이로 인해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고 국민들은 지갑을 닫아버려 경제가 꽁꽁 얼어붙었다. 테살로니키 사람들의 얼굴에도 근심이 묻어나는 듯했다. 도시는 활력을 잃었고 사람들은 깊은 시름에 잠긴 듯 무표정했다. 풀이 죽어 있었고 생기가 없었다. 상점들은 폐업했다. ‘매각’ 또는 ‘임대’ 팻말을 내건 상점들이 넘쳐났다.

이런 가운데서도 에게 해와 접해 테살로니키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화이트 타워 주변과 해변의 카페 레스토랑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자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와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첫날 도시를 간단히 돌아보고 다음 날 테살로니키 항구와 비잔틴문화박물관, 고고학박물관 등을 탐방했다. 비잔틴과 고고학박물관은 이곳이 얼마나 유서가 깊은 곳이었고 역사ㆍ문화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도시가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경제위기 때문인지 박물관에도 관람객이 많지 않았다. 바람도 심하게 불어 더 황량하게 느껴졌다.

그리스 두 번째 여행지는 테살로니키에서 3~4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메테오라였다. 깎아지르듯이 비쭉비쭉 솟아오른 기암절벽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고, 그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수도원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금융위기의 파장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아테네인들. 부활절 40일을 앞둔 사순절 바로 전날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아테네 중심인 모나스티라키 광장에서 흥겨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메테오라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중부 내륙지역을 4시간 달려 고대 유럽문명의 탄생지인 아테네로 들어왔다. 아테네에서는 4박5일간 묵으면서 거리와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고대 유적, 고고학박물관 등 각종 박물관, 아테네대학 등을 샅샅이 돌아보았다. 아테네는 그 자체로 고고학의 보고이면서 박물관이었고 세계문화유산이라 할 만했다.

기원 전 1200년쯤 도시국가로 출현해 BC 492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아테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ㆍ플라톤과 같은 탁월한 학자들로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면서 민주주의의 모태가 된 시민정치를 실현한 아테네, 그것을 통해 유럽 문화의 젖줄이 된 아테네, 그곳에는 아직도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 역시 경제위기로 신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엄혹한 구제금융 조건에 반대하는 신타그마 광장의 대규모 시위는 사라졌지만 인원감축 등을 둘러싼 사업장마다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중앙광장인 신타그마 광장을 방문했을 때에도 광장 한쪽에서 한 무리의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쫓아가 이유를 물으니 5개 연금을 하나로 통합하고 직원들을 40% 감축하는 데 대한 반대시위라고 설명했다. 한 직원은 “지금은 40%의 인력을 감축할 계획이라지만 앞으로 해고 규모가 전체의 50%를 넘을 것”이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시위를 하는 것)뿐”이라고 멋쩍게 웃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은 쉼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테네 방문 둘째 날은 부활절 40일을 앞둔 사순절로 거리축제가 벌어졌다. 이전보다 규모가 축소됐다고 하지만 우리가 묵은 아테네 중심지 모나스트라키를 비롯한 곳곳의 광장엔 축제를 즐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온 가족 또는 친구 단위의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거리엔 음악과 환호성이 넘쳤다.

아테네를 떠나기 전날 테오도로 콘솔라스라는 중년의 현지 여행사 사장과 델피 및 크레테섬, 이탈리아로의 배 여행에 대해 상담하면서 금융위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콘솔라스 사장은 낙관적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위기는 언젠간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며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서 “그리스에는 이전에도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 됐다”며 이번 위기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콘솔라스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스인 특유의 낙천성의 기원이 바로 그 ‘역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리스에 격랑이 몰아치고 있지만 장구한 역사의 물줄기에 비추어 보면 한때의 거품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때 유럽 문명의 중심에서 지금은 유럽 변방의 ‘골칫덩이’로 전락한 그리스의 역사는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저녁에 산책을 나갔더니 모나스티라키 광장 너머로 아크로폴리스가 야간 조명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지난 2000여년 동안 온갖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저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1000년 전, 500년 전에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격동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거품처럼 사라졌다. 지금 세상의 모든 것으로 보이는 금융위기도 언젠간 그렇게 될 것이다. 때문에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역경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해버리는 삶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삶의 활력을 잃지 않는 지혜가 필요한 것 아닐까. 장구한 역사가 바로 그 지혜와 낙관의 원천인 것 같았다. 그리스 여행의 절반은 그리스의 풍부한 문화와 역사 유적도 유적이지만, 이처럼 ‘시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는 여정이었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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