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일반
“다문화 용광로…런던을 세계 디자인의 중심지로 만들어”
뉴스종합| 2013-01-08 11:57
역사 의존하는 순간 창의성은 끝
건물부터 모든 학문 경계 허물어

찻잔 디자인땐 세계 茶부터 연구
수천가지 관점들 모아 의미 부여

인종·문화 섞인 런던이기에 가능
서울, 亞 국가중 최적조건 갖췄다



[런던=윤정식 기자] 영국이 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정부 차원의 디자인 예산 지원이 아니었다. 교육의 힘이었다. 영국에서는 정규 교육과정상 11살부터는 ‘디자인과 기술(Design & Tech)’을 정규 의무 교과목으로 배워야 한다. 고3 때는 직접 디자인한 전자제품을 직접 나가 팔아보라는 실습 과제가 주어질 정도다.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보다 세분화한다. 우리나라 같이 디자인은 미술의 한 분야라고만 인식하지 않는다.

헤럴드경제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세계 최고의 디자인스쿨 5곳을 찾아갔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과정으로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배출해내고 있는 학교들이다.

세계 최고 패션디자인 학교 센트럴 세인트 마틴(CSMㆍCentral Saint Martins) 예술대학을 시작으로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범접할 수 없는 동문을 배출해내고 있는 RCA(Royal College of Art), 디자인 매니지먼트 분야 1위의 브루넬대학교(Brunel Univ.)를 비롯해 디자인공학의 선구자인 킹스턴대학교(Kingston Univ.)와 디자인의 인문사회과학적 접근을 시도한 골드스미스까지 망라한다.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인 학교인 영국 런던의 CSM은 최근 분위기를 일신했다. 150여년 동안 지켜오던 옛 건물을 버리고 지난 2011년 10월 새 건물로 이사했다. 유럽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로 꼽히는 제레미 틸(Jeremy Till) 학장도 새로운 수장으로 맞아들였다.

제레미 틸 학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해 12월 1일 영화 해리포터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런던 킹스크로스 지역의 CSM을 찾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에 은빛 곱슬머리의 제레미 학장은 취임 이후 첫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라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제레미 틸 CSM대학장은 “영국이 디자인 분야의 세계 중심이 된 것은 모든 것을 융합할 수 있는 용광로적인 성격의 도시 런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아시아에서 그런 역할을 할 곳은 한국의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정식 기자/yjs@heraldcorp.com

그는 “영국이 창조산업, 그 중에서도 디자인 분야의 세계 중심이 된 것은 모든 것을 융합할 수 있는 용광로적인 성격의 도시 런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아시아에서 그런 역할을 할 곳은 한국의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제레미 틸 학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전통이 서린 건물을 버리고 새 건물로 이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과거 건물은 6곳의 11개 빌딩에 나뉘어 있었는데 다들 100년 안팎의 오래된 건물들이었다. 개ㆍ보수 비용을 계산하니 새 건물을 사거나 짓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예술계와 산업계의 흐름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낡은 건물에 가둬 놓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역사를 중시하는 유럽 학교답지 않아 보인다.

“역사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도 아니다. 현재의 시점이 바로 역사다. CSM의 학생과 교수는 지금 이 순간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하며 하나하나를 배우고 가르친다. 특히 예술대학은 절대로 역사에 의존하면 안 된다. CSM이 위대한 것은 위대한 동문 선배들 때문이 아니라 지금 수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위대해서다. 역사에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

-건축가적 관점에서 이 건물의 특징은 무엇인가.

“융합이다. 이 건물이 모든 예술 학문의 경계를 허물었다. 전에는 독립된 공간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면 지금은 각기 다른 전공의 학생들이 워크숍부터 생활 자체를 공유하고 있다. 벌써 그 결과들이 눈에 보인다. 그래픽 전공 학생이 애니메이션과 로보틱스를 결합한 실험적 디자인 결과물들을 내놓는데, 정말 나부터 어리둥절하더라.”

-예술 분야 이외 다른 학문으로의 융합에 대한 필요성은 못 느끼나.

“전통적으로 CSM은 굉장히 실험적이면서도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교다. 찻잔을 하나 디자인해도 세계 각국의 차를 담는 문화부터 연구해 들어간다. 그 과정은 문화비평부터 시작해 세계 각국의 정치, 사회, 공학을 모두 배워야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CSM의 수장으로서 교육 철학은 무엇인가.

“사람 중심의 학교를 만들고자 한다. 최고의 교수진과 그들이 만든 최고의 교육환경, 또 최고의 선배들이 만들어준 명성이 조화를 이루며 전 세계 최고의 학생들을 CSM으로 불러모으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최고의 결과물을 끄집어내면 되고 그 결과물이 이들을 또 다른 세계 최고 자리의 동문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얼마나 멋진 순환작용인가. 하지만 최고의 자리는 2~3년만 한눈을 팔아도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명성은 다시 회복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다른 질문이다. 디자인의 중심이 영원히 영국에 있을 것으로 보나.

“런던이 창조산업, 그 중에서도 디자인 분야의 세계 중심이 된 것은 유럽ㆍ미주ㆍ아시아ㆍ아프리카까지 전 세계 모든 인종이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용광로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런던의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한국의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더라. 사람들은 중국을 많이 얘기하는데 이 부분에서만큼은 정치적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뒤처질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있다.

-창조산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보인다. 당신이 생각하는 창조란 무엇을 말하나.

“수백 수천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모아 놓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창조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진원지인 영국의 지금 모습을 보면 사실 많이 쪼그라든 모습이다.

“자동차산업도 망했고 방직산업도 망했다. 모두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이쪽을 오히려 장려했다. 지금 당장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를 보는 것보다는 가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생각하는 법(How to Think)을 알고 있다. 이는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유연성을 길러준다. 모든 선택에서 옳고 그름은 있지만 맞고 틀림은 없다고 본다.”

-사실 패션에 유난히 강한 CSM을 보면 공익적이기보다는 럭셔리한 디자인의 냄새가 많이 풍긴다.

“천만에…내가 학장이 되기 전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런던 이민자들을 위한 ‘워킹 프로젝트(Walking Project)’를 소개해주고 싶다. 다인종이 모여 사는 런던의 특성을 반영해 그들이 런던 구석구석을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지도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배경은 이민자 대부분이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지만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걷기 좋은 거리 추천지가 아닌 도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도 쉽게 걸어다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를 알리기 위해 노숙인들이 판매하는 잡지 ‘빅이슈’에 지도를 싣기도 했다. 디자인은 거창하고 럭셔리한 게 아니다. 생활 속에 다양한 문화가 융합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yj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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