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원작 소설과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가 가진 힘을 무대 위에도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한 장면 한 장면 시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울 정도로 시각적, 청각적으로 관객의 만족도를 높였다.
무대가 시작도 하기 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레베카의 상자다. 굵게 찍힌 ‘R’자가 인상적인 무대 프레임은 다양한 색으로 끊임없이 변신한다.
우아하지만 음산함과 어두움을 잘 살리는 건 다양한 보라색의 스펙트럼이다. 적색과 청색이 심리의 극단을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 그 중간에 있는 보라빛은 맨덜리 저택과 20세기 초 상류사회의 품위, 화려함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주인공 ‘나’와 막심, 댄버스 부인의 질투와 우울, 복잡한 심리상태를 시각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몬테카를로와 즐거운 한 때는 밝은 푸른색이, 극적 갈등과 절망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엔 적색이 무대를 지배한다.
보라빛의 커튼이 무대를 덮은 레베카의 방은 그 미스테리함을 더 증폭시키는 요소다. 커튼 뒤로 은은하게 비치는 실내,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증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영상은 세트, 극의 전개와 어울리게 적절히 잘 사용했다. ‘나’의 취미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게 만드는 무대 첫 장면, 16년 전 과거로의 회귀를 돕는다. 거대한 맨덜리 대저택, 세찬 파도, 짙은 어둠 속 검은 바다도 3D를 활용한 영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극을 가장 빛나게 만드는 것은 무대를 압도하는 댄버스 부인의 카리스마다. 특히 옥주현의 댄버스 부인은 주연같이 빛나는 조연이다. 다소 과장된 목소리와 톤, 하지만 메조소프라노의 저음을 바탕으로 절정에 달하는 고음을 무리없이 소화하는 옥주현은 관객을 주눅들게 만들 정도로 존재감 하나는 확실하다.
레베카의 방 발코니에서 ‘나’와 댄버스 부인이 부르는 ‘레베카’는 죽음을 부르는 유혹이다. 댄버스 부인은 객석을 압도할 것처럼 날카로운 무표정 속에서 우는 건지 비웃는 건지 오묘한 미소를 날린다. 옥주현은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받은 소설 ‘레베카’ 초판본으로 독학하며 단단히 마음먹었던 것인지 악녀로 제대로 변신했다.
지평선에 걸린 해를 향해 나아가는 고전영화 스타일을 따라한 듯한 결말, 자욱한 안개와 연기, 눈앞의 불길과 타오르는 저택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LG아트센터는 몰입도를 높이는 공간이다.
연초 ‘오페라의 유령’, ‘아이다’, ‘지킬앤하이드’등 대작 뮤지컬들 속에서, 뮤지컬 ‘레베카’는 매니아들의 주머니를 또 한 차례 털어갈 모양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100마디 말이 필요없다. 그냥 가서 봐야한다. LG아트센터에서 오는 3월 31일까지 월요일을 빼고 매일 저택은 불타고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다.
문영규 기자/ygmoon@heraldcorp.com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