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1월,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대형 조명설치작업 ‘사라진 베를린 장벽’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높이 4.5m,길이 25m의 이 작품은 조국 분단으로 생이별의 아픔을 겪은 한국의 이산가족 5000명의 사진과 이름을 담았기에 독일및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인 한국의 이슈를, 통독의 현장이었던 브란덴부르크에서 풀어낸 그의 작업은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1면을 장식했다. 또 BBC, 로이터, CNN에도 보도됐고, 베를린의 한 방송은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해 방영했다.
그 여세를 몰아 이은숙은 고국인 임진각 민통선 철책에서 오는 23일 설치미술전을 펼친다. 정월대보름 지신밟기를 하며 소원을 빌듯, 대보름 하루 전에 자유의다리 철책선에 ‘정전(停戰) 60년…그리운 북쪽 가족을 부른다’라는 조명작업의 불을 밝히며 겨레의 염원을 기원할 예정이다.
설치미술가 이은숙 안훈기자 rosedale@ heraldcorp.com |
▶독일 국민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길 염원하며= 이은숙은 투명 폴리에스테르 필름에 다양한 빛깔의 형광실들을 일일이 손으로 압착시킨 뒤, 자외선 발광체를 삽입했다. 발광체가 빛을 발하면 북녘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의 이름과 사연, 6.25 피난민의 사진이 형광실과 함께 도드라지며 이별의 아픔, 재회의 희망을 오롯이 드리우게 된다. 이같은 조명작업은 이은숙이 오랜 실험 끝에 창안한 것으로, 섬유예술(이화여대)과 공예(홍익대)를 전공하며 여러 장르를 오가며 부단한 모색을 벌인 결과 터득한 독자적 기법이다.
한글 자모 모양의 큼지막한 구조물로 이뤄질 이번 작품에 대해 작가는 “한올 한올 얽혀 있는 실은 고달픈 한국현대사의 상징이자, 그 실타래에서 풀려나고픈 희망과 염원을 의미한다. 전쟁이 끝난지 어느새 60 성상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한(恨)을 간직한 실향민들을 위무하기 위해 철책선을 따라 작품을 20여m쯤 설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은숙은 당초 비무장지대(DMZ) 철책선에서 작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군(軍)의 허가가 떨어지지않아 임진각으로 바꿨다.
이은숙이 이처럼 분단과 이산가족에 집중하는 것은 집안 내력 때문이다. 함흥에서 월남한 아버지는 조개탄을 사용하는 대성난로를 설립해 키웠다. 평양의대를 다니다가 거제도로 피난와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어머니 역시 실향민이다. 특히 아버지는 96세로 타계하기까지 북에 두고온 가족을 몹씨도 그리워했다.
작가는 “아버지는 월남 전 북에서 결혼해 자식을 넷이나 두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북쪽 가족들의 생사를 알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모두 허사였다”며 “아버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거의 없는데 ‘바쁘셔서 그런가 보다’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두고온 자식들을 생각해 일부러 그러신 것같다”고 했다.
이번 임진각 작업은 부친의 회한을 풀어드리기 위함이자, 이복 언니 오빠들에 대한 그리움, 나아가 이 땅의 모든 이산가족들의 애달픔을 달래기 위한 작업인 셈이다. 개막식(23일 오후 6시)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슈테판 드라이어 독일문화원장이 참석해 스피치와 점등식을 주관한다. 전시는 3월 10일까지 계속된다.
▶오똑이처럼 쓰러졌다 일어서며 세계를 공략= 이은숙은 브란덴부르크에서의 조명 설치작업으로 독일및 유럽지역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굵직굵직한 전시에 여러 번 초대돼 작품을 선보였다. 미국에서도 두차례 상을 받았다. 그러나 국내에선 그닥 조명받지 못했다. 국내의 공모전에 수없이 응모했고, 개인전도 매년 열었는데도 말이다. 비닐과 형광실을 이용한 그의 특이한 작업은 “유치하다” “너무 공예적이다”는 평만 받았다. 갤러리들도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많은 공력을 요하는 그의 실험성 강한 작업을 눈여겨 본 건 독일에서 날아온 큐레이터였다. 프랑크푸르트의 수공예박물관에서 ‘한국섬유예술전’을 기획 중이던 큐레이터는 ‘이은숙의 작업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작업’이라 평하며, 1999년 전시에 그를 초대했다. 독일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전시 이후 이은숙은 베를린 동서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현대조명미술전에 초대되는 등 이름을 알렸고, 2000년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 캐나다와 독일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건 부친의 병환 때문이었다.
“독일에서 작업을 하기까지 굴곡이 참 많았다”는 그는 특히 1986년 4월 4일을 잊지 못한다. 6살, 2살짜리 아들을 키우며 작업을 병행하던 그는 가을에 개인전을 열기 위해 전시장을 잡아놓은터라 마음이 좀 급했다. 마침 작은 아들이 낮잠을 자길래 ‘꼬맹이가 깨기 전에 작품을 완성해야지’하며 고체 파라핀을 가스불에 올려놓았던 것.
원래 파라핀은 인화성이 강한 물질이라 가스불에 올려놓는 건 절대 금물인데도 당시에 그는 그같은 상식이 전혀 없었다. 오직 파라핀을 빨리 녹여,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 속에 가득했던 것. 때마침 걸려온 남편의 전화를 받는 사이에 파라핀이 기화하면서 아파트에 큰 불이 나고 말았다. 그는 황망히 불을 끄느라 전신 3도 화상을 입었다. 대소변까지 남이 받아줘야할 정도로 화상이 심했고, 1년간 병원신세를 졌다. 멀쩡한 허벅지의 살을 화상을 입은 오른쪽 팔 등에 이식하는 수술등을 여섯차례나 받아야 했다. 의사는 “어쩌면 오른손을 쓸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아, 작가로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작업이 너무 많은데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꿨는데 예수께서 마을동산에 오셨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일행을 따라갔더니 예수께서 내 손가락 하나 하나에 아주 강렬한 레이저 빔을 쏴주시는 거였다. 꿈 속이었지만 너무 선명했다”. 그리곤 근육들이 차츰 회복됐다.
그는 말한다. “4월 4일 오후 4시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내 이멜 아이디에는 444가 들어가 있다. 사고 이후 공모전에 수없이 떨어지면서도 작업의 끈을 놓치 않았던 것도 죽음의 문턱까지 가봤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생이고, 하고 싶은 작업들이 참으로 많다. 2018평창올림픽 기간 중 DMZ 조명설치 작업, 아우슈비츠에서의 홀로코스트 프로젝트, 미국 인디언 마을에서의 프로젝트 등 모두 엄청난 노력과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허나 죽기 전에 꼭 해볼 거다. 아, 광화문 옆 담벼락에서의 설치작업은 금년에 꼭 하려 한다. ‘서울의 얼굴’인 광화문 광장에, 한국인의 얼과 혼이 집약된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 서울이 요즘들어 많이 근사해지긴 했지만 아직 광화문은 아쉬운 구석이 많기에 더욱 실현해보고 싶은 작업이다. 이 작업, 꼭 될 것이라 믿는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지니까.” 오똑이같은 이은숙의 눈이 그 순간 ‘반짝’하고 빛났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