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조동석ㆍ윤정식ㆍ하남현 기자]1985년 9월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일본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였다. 당시 미국은 쌍둥이(재정과 무역) 적자를 기록하면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 재무장관들에게 달러화 강세를 시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핵심 대상 국가는 일본과 독일. 두 나라는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를 내던 터였다. 이들은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하며, 이것이 순조롭지 못하면 정부의 협조개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는 내용의 ‘플라자합의’에 서명했다.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는 즉각 오른 반면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다.
한국은 저유가와 저금리에 이어 저달러(엔화 대비 달러화 가치 하락)로 ‘3저(低)’ 호황을 구가했다. 1986년부터 3년 동안 연 10%가 넘는 성장률을 보였다. 반면 일본은 엔고로 수출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어 부동산시장 버블이 붕괴되면서 지금까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잃어버린 20년을 찾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은 엔저에서 시작되고 있다. 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주요 선진국들은 엔저를 사실상 용인했다. 주요 선진국들이 경기회복을 위해 통화팽창 정책을 사용하는 가운데 공조국가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일본의 엔화 약세가 북한의 위협보다 더 큰 한국경제의 걸림돌”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수 의견에 그쳤다.
22일 엔화는 달러당 100엔에 근접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엔화가 장중 한때 달러당 99.98엔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2009년 4월 14일 이후 가장 낮다. 시장은 100엔대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경제학) 교수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엔화 가치는 더 떨어지고, 원화는 북한리스크가 줄어들면 가치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면서 “지난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엔화약세, 원화강세의 현상이 나타나고 결국 위기 상황으로 들어갔다”고 우려했다.
일본 증시를 끌어올린 아베노믹스는 실물경제로 옮겨붙고 있다. 일본의 3월 백화점 판매량은 전년보다 3.9% 증가했다. 수도권 신규 아파트 판매량도 같은 기간 48% 증가했다. 20여년 동안 무기력했던 일본이 활기를 띄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일 무역적자 규모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지난 1월 15억2000만달러 적자에 이어 2월 20억7000만달러, 3월 26억2000만달러를 기록하며 적자 폭을 키우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엔저가 우리 수출 전선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최근 대일 무역적자의 흐름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일본팀장은 “엔저 추세를 바꿀 수 없다. 그렇다고 한국정부가 나서 시장에 맞설 수도 없다”면서 “최소한 7월까지 엔저 정책이 지속될 것으로 보는데, 일본 참의원(상원)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때까지 엔저 정책을 밀어 붙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1985년 플라자합의의 최대 수혜국 한국은 2013년 G20 회의의 최대 피해국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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