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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크엔드] 부르는게 ‘값’ · 사람냄새는 ‘덤’…오늘도 추억을 사고판다
뉴스종합| 2013-09-06 11:14
도깨비시장 상인들 정착한 풍물시장
앤티크 전화기·동물박제…희귀품 즐비
외국인 관광객에겐 필수코스 자리잡아

고서화·목기·도자기…답십리 고미술상가
1000년된 물건도 몇만원에 장만할수도

회현역 지하상가 자리잡은 중고 LP시장
60년前 음반부터 외국 음반까지 한자리에




“만원만 받아.”

“25개야. (돈) 더 줘.”

“여기 만원. 더는 안 돼.”

손목시계를 담은 비닐봉지를 가게 주인에게 건네준 아주머니는 달랑 1만원짜리 한 장만 손에 쥔 채 멀리 사라졌다. 흐뭇해하는 가게 주인은 비닐봉지에서 시계를 하나씩 꺼내 정성스럽게 닦은 뒤 좌판에 놓고 팔기 시작했다.

서울풍물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정’이다. 여기서는 손님이 물건을 사기도 하지만 팔기도 한다.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다. 흥정을 잘하면 ‘득템’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독박’을 쓸 수도 있다. 대신 사람 사는 냄새는 실컷 맡을 수 있다.

서울풍물시장은 중고 물품 거래의 원조로, 골동품의 메카다. 6ㆍ25 전쟁 이후 청계천 주변에 고물상이 몰리면서 시장을 형성하다 1973년 청계천 복개 공사가 완료된 뒤 청계7~8가 삼일아파트를 중심으로 중고 시장이 형성됐다. 도깨비물건처럼 낡고 오래된 신기한 물건들을 판다고 해서 도깨비시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 ‘원조’ 중고 시장에서 관광명소가 된 ‘풍물시장’=청계천이 복원되면서 도깨비시장 상인들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잠시 거처를 옮긴 뒤 현재 신설동 옛 숭인여중 운동장 부지에 마련된 2층 현대식 건물에 정착했다. 식당을 포함해 점포가 885개에 달한다. 구역별로 빨강동(식당)ㆍ주황동(의류)ㆍ노랑동(잡화)ㆍ초록동(골동품)ㆍ파랑동(의류)ㆍ남색동(잡화)ㆍ보라동(취미생활용품) 등으로 구분돼 있다.

서울시에서 운영한 이후 내ㆍ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필수 코스가 됐다. 동묘공원으로 이어지는 풍물시장 정문에는 문화 행사를 열 수 있는 무대가 마련돼 토요일마다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마리아병원으로 연결되는 후문에는 전통문화체험관이 상시 무료로 개방돼 방문객을 맞고 있다.

풍물시장답게 건물 안팎이 모두 어수선하다. 주인이 누군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물건들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이런 것도 파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귀한 물건들이 즐비하다.

미군 전투식량, 닐테이프테크, 앤티크 전화기, 초기 브라운관 TV, 성인용 비디오, 거북 등 동물 박제, 각양각색의 목기 장식품과 서화 등 워낙 종류가 많아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만물상이란 말이 딱 맞다. 초록동 한쪽 끝에서 흘러나오는 축음기 음악 소리와 정문 길가에 나와 있는 옛날교복 판매점은 풍물시장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박창호 풍물시장 마케팅팀장은 “동묘공원 주변에 있는 노점상은 불법으로, 소비자 피해가 발생해도 보호받을 수 없다”면서 “전통과 현대의 멋이 공존하는 풍물시장을 이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 ‘격’이 다른 중고 시장 ‘고미술상가’=풍물시장 후문으로 나와 천호대로를 따라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답십리동 고미술상가’도 중고 시장으로 유명하다. 고미술품은 풍물시장에서 파는 골동품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서화류ㆍ목기류ㆍ도자기류 등으로 역사적 가치가 더 높다.

고미술상가는 지하철 5호선 답십리역 2번 출구 방향 이면도로에 쭉 들어서 있다. 빛바랜 주황색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이 지나다니기 좁을 정도로 고미술품이 복도까지 나와 있다. 웅장한 기와집의 안방 문으로 사용됐을 법한 문짝부터 서랍장ㆍ백자ㆍ그림 및 각종 공예품 등 종류도 다양하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고미술품을 보노라면 마치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하다.

여기서는 오래된 물건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싼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희소성이다. 올해로 39년째 고미술품을 다뤄온 이유복(60) 고유당 대표는 “신라토기, 백제토기, 고려토기 이런 물건들은 1000년 이상 됐지만, 가격은 몇만원, 몇십만원 정도밖에 안 된다”면서 “아무리 좋은 물건도 안 팔리면 값이 내려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고미술품 특성상 시장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축소된다. 이 대표는 “고미술품은 한계점을 갖고 있는 시장”이라면서 “좋은 물건들은 이미 손님들이 다 사갔고, 도시나 시골이나 괜찮은 물건이 나오는 게 없어 (우리도) 물건을 구입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장사가 안 되다 보니 최근에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에서 가져온 골동품을 취급하는 가게도 늘고 있다.

▶살아 있는 음반가게 ‘중고 LP시장’=지하철 4호선 회현역 지하상가에는 중고 LP레코드판을 파는 점포들이 몰려 있다. 명동 일대에 흩어져 있던 LP가게들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지하상가로 내려왔다.

이전보다 유동인구는 많지 않지만, 단골손님은 꾸준히 찾고 있다. LP판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누렇게 색바랜 LP판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절로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여기서는 1950~60년대 녹음된 음반부터 ‘가왕’ 조용필의 최신 음반까지 LP판으로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LP판을 사기도 하지만,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외국 음반들은 유럽이나 미국 현지에서 직접 구매한다. 그렇게 쌓여 있는 LP판이 어림잡아 수만장은 돼 보인다. 가격도 다양한데 200만~300만원을 호가하는 LP판도 있다.

고객층은 초등학생부터 외국인까지 다양하다. 부친의 LP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해오고 있는 이석현(46) 리빙사 대표는 “10대라고 해서 모두 최신곡만 듣는 것은 아니다”면서 “과거 지휘자나 연주자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해 LP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중고 시장의 새 바람 ‘중고 명품’=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중고 명품 시장은 중고 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11번가에는 지난해부터 중고 명품 업체들이 입점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11번가의 중고 명품 매출은 지난해는 전년 대비 20배, 올 상반기에는 180% 이상 늘었다. G마켓과 옥션도 중고 명품 업체와 제휴해 전년보다 각각 120%, 40%의 높은 매출을 올리며 중고 명품 시장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

한 업체 관계자는 “불황으로 새 제품 구매력이 떨어진 고객층이 중고 명품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면서 “역으로 불황에 갖고 있는 명품을 팔려는 고객도 늘고 있어 제품 순환도 좋다”고 말했다. 

최진성 기자/ipen@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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