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한석희 기자]5일(현지시간) 오후 6시. 국빈만찬을 2시간 앞두고 버킹엄궁 2층 볼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궁 관계자는 “여왕께서 만찬장을 직접 꼼꼼히 점검하고 있어서 기다려야 한다”며 일체 출입을 막았다. 박근혜 대통령을 맞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이날 준비상황은 물론 접시와 포크, 나이프 등 테이블 세팅까지 모든 상황을 일일이 점검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심지어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점검하는 세심함을 보였다고 한다. 영국 국빈방문 의전에서 최고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박 대통령을 위한 국빈만찬은 이렇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세심한 배려로 시작됐다.
오후 8시 정각. 꽃무늬가 들어간 흰색 치마에 주황색 저고리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박 대통령과 흰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함께 만찬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당초 3시간 예정이었던 이날 만찬은 3시간을 훌쩍 넘어 끝났다. 이와관련, 영국측 의전장은 한국측 참석자에게 “이례적인 일이다”며 “근래에 없었던 장시간의 오찬이 진행됐다”고 했다.
이날 만찬장은 분홍색과 주황색 꽃들로 향연을 이뤘다고 한다. 영국 왕실의 전통대로 ‘ㄷ’ 자 모양으로 배치된 테이블 정 중앙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왼편에는 남편 필립공이, 오른편엔 박 대통령이 앉았다.
한쪽 벽면 2층에는 대형 파이프와 오르간, 오케스트라가 있어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비발디 콘체르토 작품 3번과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등 16개곡이 연주돼 만찬 분위기를 돋웠다.
‘지상 최고의 의전’ 답게 이날 만찬 메뉴도 최고급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전체요리로는 야채크림소스를 뿌린 송어 조림이, 메인 디시(주요리)는 포트와인과 오렌지, 버터 등으로 만든 ‘포트 소스’를 뿌린 꿩구이가 나왔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빈만찬 당시엔 버섯을 곁들인 사슴요리(느와제트)가 메인디시로 나왔었다.
이날 후식으로는 배와 초콜릿 케익이 나왔으며 카멜밸리 피노누아 로제, 끌로 데 랑브레 퓔리니 몽라쉐 1등급, 샤또 레오빌 라스까즈 1989년산, 샤또 쉬뒤로 1997년산, 빈티지 포트 폰세카 1977년 산 등 다섯 가지 와인이 함께 곁들여졌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이날 만찬사에서 “수교 130주년인 올해 박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다시 한번 환영하고 양국이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영국군의 한국전 참전을 통해 쌓아올린 연대감을 바탕으로 양국은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러면서 “영국은 혁신과 창의성의 전통을 갖고 있으며, 한국은 기술적 전문성과 국민의 근면성이 세계적 평가를 받고 있어 상호 강점을 융화해 공동의 이익을 창출해나가고 있다”며 “교육, 과학연구, 관광 등에서 양국간 긴밀한 협력관계에 만족한다”고도 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답사를 통해 “우리의 미래는 별을 보고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며 “130년의 선의와 우의를 바탕으로 양국간의 창의적 재능과 경험을 결합해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미래를 창출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앞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공식환영식 직후 버킹엄궁에 도착한 박 대통령을 직접 방으로 안내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박 대통령에게 방에 얽힌 사연도 소개하는 등 박 대통령에게 상당한 예우를 했다고 한다. 국빈방문 기간 이틀간 묵게될 버킹엄 궁 내 ‘벨지언 스위트’(Belgian Suite)는 여왕의 3남 1녀 중 차남과 삼남인 앤드루 왕자(요크 공작), 에드워드 왕자(웨섹스 백작)가 태어난 방이며, 빅토리아 여왕 시절엔 여왕의 삼촌이 좋아했던 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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