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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다구’ 달고 산 공직인생 27년
뉴스종합| 2013-12-12 11:13

깡다구. ‘악착같이 버티어 나가는 오기’를 속되게 이르는 말.

‘깡다구’는 공무원이란 직업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고위 공무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한평생 깡다구로 살아온 공직자가 있다. 아니 깡다구로 버틸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지 모른다. 지금은 서민의 내집 마련을 도와주는 한국주택금융공사를 맡은 서종대 사장. 볕에 오래 그을린 듯한 피부에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는 얼굴에서 남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냥 해!” 서 사장이 승부수를 던질 때 꼭 하는 말이다. 자신감과 책임감의 표현이다.

“바닥에서 시작해 올라온 사람은 남들에게 없는 자신감이 있어요.” 공직생활 27년, 이 승부수는 통했다. 2010년 9월 ‘세종시 수정안’만 빼고. 그는 단 한 번의 실패로 스스로 공직의 옷을 벗었다.

삶을 되돌아볼 여유도 잠시, 그를 다시 볼 수 있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깡다구’라는 말이 팍팍한 대한민국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표현하는 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서종대의 삶은 ‘깡다구’였다.



“건설교통부 출신이라고?”

2011년 11월. 서울 남대문로 주택금융공사 본점이 술렁였다. 갑작스런 사장 교체 소식에 직원들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김경호 사장이 취임 두 달도 안돼 건강을 이유로 사퇴하면서 걱정과 당혹감이 교차했다. 곧바로 후임 사장에 대한 정보가 돌았다. 역대 사장들과 마찬가지로 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 출신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한쪽에서 짧은 외침이 나왔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출신이라고?” 이어 곳곳에서 ‘서종대’라는 이름이 들렸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처음 맞이하는 건교부 출신 사장이다. 주택금융공사에 ‘주택’ 두 글자가 있지만, 업무는 ‘금융’이었다. 금융권에서는 ‘노가다(막노동) 사장’이라고 폄하했다.

“세계적인 주택금융 전문기관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기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며칠 후 서 신임 사장의 취임식이 열렸다. 그의 포부를 의례적인 인사말로 받아들이기에는 그가 내뿜는 에너지가 너무 강력했다.

서종대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이 퇴근 전 집무실에서 스텝머신을 타고 있다. 내일을 향해 다시 뛰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항상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스텝머신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깡다구’ 기질이 엿보인다. 깡다구 기질은 그를 순천역 앞 꼬마 호객꾼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주택정책 전문가로 이끌었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2013년 12월. 서 사장이 취임한 지 2년이 지났다. 그가 취임사에서 밝힌 포부가 조금씩 실현됐다. 장기ㆍ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인 ‘보금자리론’과 ‘적격대출’은 정부의 가계부채 연착륙 대책과 제대로 맞아떨어지면서 서민의 내집 마련에 든든한 자금줄이 되고 있다. 2010년 5조8000억원에 그쳤던 보금자리론 대출 실적은 2012년 11조원을 훌쩍 넘었다. 그가 만든 적격대출은 출시 첫해인 지난 한 해 14조원이 나갔다.

노후대책으로 자리를 잡은 ‘주택연금’은 주택 보유자의 70%가 가입 의사를 밝힐 정도로 친근해졌다. 출시 첫해인 2007년부터 2011년까지 7000계좌에 불과했던 가입자는 지난해에만 5000계좌를 유치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노가다 사장’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사의 기본업무인 자산유동화와 주택보증은 제가 건교부에서 관장했던 업무입니다. 공사의 목표와 비전을 세우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죠.”

그는 임기 1년을 앞두고 새 포부도 밝혔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내년이면 공사 설립 10년이 됩니다. 터닝포인트에서 필요한 상품은 다 갖춰졌는데 민간 쪽에 유동화를 활성화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앞으로 주택연금 100만명 시대를 열고 시장 유동화라는 본연의 업무를 정착시킬 것입니다.”

실패가 안겨준 제2의 인생

서 사장의 복귀는 관료사회에서 회자됐다.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을 주도한 고위 공직자가 MB(이명박 전 대통령)정부에서 다시 발탁된 것이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이후 금융권에선 두 번째 사례였다.

김 전 위원장은 ‘부실 저축은행 구조조정’이라는 특명이라도 있었지만, 서 사장은 말그대로 ‘대타’였다. 서 사장은 “MB정부에서 공직으로 갈 생각은 전혀 못했다”고 고백했다. ‘깜짝 인사’에 본인도 놀란 셈이다.

그는 특히 MB정부 초기인 2010년 9월 ‘세종시 수정안 부결’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공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당시 국무총리실 세종시기획단 부단장이었다. 세종시 수정안 부결은 그의 27년 관료생활에 처음으로 찾아온 ‘실패’였다.

사퇴 당시 그의 나이는 만 50세. 아쉬움은 컸지만, 실망하지도 않았다.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싼 논의가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흘렀기 때문에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사퇴 충격을 줄여줬다.

서 사장은 카이스트(KAIST) 초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MB정부에서 ‘전관예우’를 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았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카이스트 세종시 캠퍼스 문제로 인연을 맺었던 한 교수가 도시계획론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려대 10년 겸임교수 경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젊은 수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동안 쓰지 못했던 박사 논문을 완성했고 말없이 자신의 옆에서 함께해 준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신앙생활도 활발하게 했다. 공직자의 DNA가 남아있었던 걸까. 신앙생활 중 국가를 위한 마음은 여전했다.

“신앙생활에 심취하면서 삶의 방향을 새로 잡게 됐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도 없어졌습니다. 주택금융공사로 오기 전 1여년의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알찬 시간었습니다.”

실패가 안겨준 제2의 인생이었다. ‘감사’라는 말도 이때부터 입에 달고 살았다. 여기까지 올라온 게 경이롭다고 스스로 표현할 정도다.

“제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세상에 굉장히 감사하게 됩니다. 제 고향 친구 중에는 전국 단위의 폭력 조직 두목도 있었거든요. 그동안 좀 더 겸손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내가 이 집에 가장이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멀리서 아버지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약주 한잔 하시고 온 게 틀림없다. 신라의 달밤은 가수를 꿈꿨던 아버지의 애창곡이다. 전남 여수 출신인 아버지는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경남 김해 출신인 어머니와 만나 결혼했다. 부모님은 1948년 한국으로 건너와 전남 순천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순천역 앞에서 종업원 5명을 둔 이발관을 운영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소기업 사장이다. 모은 돈으로 집을 짓고 논밭을 샀다. 아버지는 여름에는 바다낚시를, 겨울에는 사냥을 다니면서 풍류를 즐겼다.

아버지는 서 사장을 아꼈다. 형이 있었지만 집안 행사에 꼭 그를 데려고 다니셨다. “아버지는 항상 참판벼슬을 지냈던 조부님들을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먹구름을 몰고 왔다. 평소 고혈압이 있었던 아버지는 쌀쌀해진 초겨울 날씨에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서 사장은 마냥 울기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은 서서히 무너졌다. 몸이 약한 어머니는 이발관을 접고 그 자리에 식당을 열었지만, 고생한 만큼 벌이는 변변치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형이 직업군인으로 입대하고, 큰 누나가 시집을 갔다. 식구는 줄었지만 여전히 딸린 입이 다섯이다.

식당 일은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벅찼다. 서 사장은 중ㆍ고교 시절 순천역 앞에서 여행객의 짐을 들어주고 식당으로 데려오곤 했다. 호객꾼이었다. 끼니는 손님들이 먹다남은 밥으로 대신했다.

한번은 식당 일에 지친 어머니가 여종업원을 고용하자고 제안했다. 서 사장은 극구 반대했다. “우리 식구도 먹고 살기 힘든데 입 하나가 더 늘잖아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그냥 우리끼리 해요.”

1976년 4월 어느 날 밤. 화장실을 갔다 오던 어머니가 쓰러진다. 고등학생 서종대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뛴다. 온몸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등에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등에 업힌 어머니를 병원에 내려놓지도 못한 채 바로 돌아서야 했다.

“이미 돌아가셨네. 집으로 모시게.”

의사의 빠른 진단이 야속했다. 과로사였다. 서 사장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지만 소리 지를 힘도 없었다. 장례 기간에는 아무리 울려고 해도 이상할 정도로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독한 놈.” 친척들이 귓속말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가장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대꾸했다.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중했다.

“나중에 제가 결혼해 자리를 잡은 뒤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때 쏟아내지 못했던 눈물이 이제서야 나오네요.”


다시 발동한 깡다구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학업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명문 순천고에서 전교 5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가장이 된 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집안 재산을 모두 팔아 직업군인인 형에게 넘겨주고 누나와 동생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서 사장은 혼자 순천에 남아 학업을 마쳤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입학 시험을 봤지만 가고 싶었던 학교를 떨어졌다. 대신 후기대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더 나은 학교에 합격했다는 친구들의 소식에 자존심이 상했다. 재수를 할 수 없었던 가정형편이 원망스러웠다.

“방황했어요.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관심이 없었죠.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깡다구 기질이 발동한다. 민간기업에 취업하는 것보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직이 낫다는 생각에 행정고시로 마음을 다잡았다. 2년 동안 모든 것을 끊고 독하게 공부했다. 1981년 행시 25회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의 나이 만 21세.

“관리직 공무원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습니다. 군대에 다녀온 뒤 공무원 임용을 신청하기로 했죠.”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형의 권유로 육군 보병 장교에 지원했다. 문제는 50㎏도 안 되는 몸무게였다.

“그 몸으로 보병장교에 버틸 수 있겠소?” 면접관이 물었다.

“보병장교로 가겠습니다. 무조건요.” 서 사장은 경리장교로 근무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여유로웠던 때였어요.” 군 생활이 편하다는 게 아니다. 가장의 짐을 처음으로 벗어던지고 온갖 고민에서 해방된 서종대였다.

건설부에서 시작한 관료생활. 그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대한민국 전 국토를 휘젓고 다녔다. 건설부 주요 요직은 물론 청와대, 대사관 등에서도 근무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여러 곳에서 부르다 보니 한 부서에 1년 이상 머무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를 ‘건설부의 소방수’라고 부르는 인사도 있다.

1987년 개발이익환수제, 1991년 주택물량할당제, 1995년 사회간접자본(SOC) 민간유치사업 제도, 2001년 생애최초주택대출, 2002년 국민임대주택법(현 보금자리주택법) 등이 그의 작품이다. 2003~2005년 신도시기획단장 때 추진한 수도권 2기 신도시는 학계에서 ‘서종대 신도시’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또 2년간 주민과 끈질긴 대화를 통해 시화호 갈등을 해소했다. 지금은 갈등관리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된다.

“공직에 있을 때 집에 가는 것보다 사무실에 있는 게 더 즐거울 때가 많았어요. 내가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모두 했어요.”

승진을 거부하다 혼날 때도 있었다. “이용섭 장관 때 1급 승진을 거부했다 혼만 났어요. 이 장관은 ‘공직을 장난으로 생각해. 국가적 위기야.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라고 단호하게 말씀해서 더이상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공직은 구걸하는 게 아냐”

지난 3월 유럽커버드본드총회는 그를 기조연설자로 초청했다. 이어 7월 태국 정부가 서 사장을 초청했다. ‘2013년 아시아 모기지유동화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맡아달라는 요청이다. 여기에는 일본주택금융공사를 비롯해 아시아 주요 유동화기관 및 금융기관 대표들이 참석했다. 특히 태국과 홍콩, 싱가포르는 “한국주택금융공사를 벤치마킹하겠다”고 조언을 부탁하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정부와 월드뱅크가 공동 주최한 국제주택금융 세미나의 공동의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새 정부에서도 직을 유지하는 몇 안되는 금융공기업 기관장이다. 현 정권과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정권 실세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참여정부와 MB정부를 거쳐온 소위 ‘다른 정부 사람’이다.

“공직은 구걸해서 얻는 게 절대 아닙니다. 정부에서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둬야죠. 주택금융공사를 내가 일군 회사도 아니고(웃음). 정부가 나를 필요로 하니 이 자리에 앉힌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어찌보면 과거가 편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최고경영자(CEO) 밑에서 결정된 것을 열심히 하면 됐지, 일의 성패에 대한 책임은 없었어요. 그런데 CEO가 되니까 경영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정책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부담이 큽니다.” 깡다구 서종대의 책임감이다. 그는 “직원이 부도덕한 일을 했을 때도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 사장은 고위 공직자 사회의 ‘선비정신’을 강조한다. 조정이 부르면 가서 열심히 일하고 물러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낙향해서 후학을 가르친다는 그런 자세다. “임명직은 겸손해야 합니다. 임명되면 열심히 일하고 물러날 때가 되면 아무 말 없이 물러나야 하죠. 아직 (저에게는) 그만두라는 얘기가 없네요(웃음).” 그는 오늘도 서민주택을 생각한다.

최진성 기자/ipen@heraldcorp.com  


서종대 사장이 걸어온 길…

▶1960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고ㆍ한양대

▶행정고시 25회

▶청와대 경쟁력기획단 과장

▶ 건설교통부 신도시기획단장ㆍ주택 국장ㆍ주거복지본부장

▶국무총리실 세종시기획단 부단장

▶ 카이스트(KAIST) 건설환경공학과 초빙교수

▶현 주택금융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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