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40년 수채화 한우물…정우범 화백의 우연, 인연 그리고 필연
라이프| 2014-09-05 08:39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빨강, 노랑, 파랑, 형형색색 꽃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면 온갖 근심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물기 가득 머금은 화폭은 ‘환타지아(Fantasia)’라는 제목처럼, 현실을 초월한 이상향의 세계를 펼쳐놓은 듯 하다. 마음 속 번뇌를 두지 않고 작작유여(綽綽有餘)하는 ‘도인’이나 그릴 법한 ‘한가로운’ 무릉도원이다.

남도 사투리가 걸쭉한 수채화가 정우범(68)은 유화를 뛰어넘는 수채화로 1990년대부터 미국에서 먼저 인정받으면서 한국 화단을 놀라게 했던 작가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아이처럼 천진난만함을 간직한 작가의 붓 끝이 닿은 그림들은 세상사 찌든 풍경조차도 환타지아로 바꿔놓을 듯 하다.

정 화백은 깊고 풍부한 색감에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는 꽃들을 환타지아라는 감흥의 고리로 풀어내면서 색다른 화풍의 제2 전성기를 맞고 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그의 수채화를 두고 “자연미에 필적하는 무한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확인시켜주는 그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최근 인사동 선화랑에서 9년만에 개인전을 연 정 화백은 오랜만에 갖은 전시회에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다. 가난 혹은 역경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내걸었지만, 정작 작가의 일생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정 화백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초등학교 교사에서 화가로 전업하게 된 배경, 그리고 화업 40년을 이끌어 준 우연과 인연들에 대해 복기하듯 풀어놓았다. 환타지아는 우여곡절 인생의 편린들이 아름답게 승화된 모습인 듯 하다.

지상 낙원처럼 펼쳐진 대형 꽃그림 앞에 정우범 화백이 포즈를 취했다. 작가는 아침 점심 저녁 시시때때로 변하면서도 늘 거기 그대로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 있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나를 세상밖으로 끌어낸 건 태권도 박사 이기정=“소위 인텔리겐차였던 큰 형님이 6ㆍ25 당시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시달림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으니까요. 9남매 중 막내인 저는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미대는 꿈도 꿀 수가 없게 됐어요. 결국 어렵사리 광주교대에 들어가긴 했지만 학업이 뜻이 없으니 완전히 놀아버렸죠”

결국 제대로 졸업도 하지 못한 채 낙향해 ‘노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가다 우연히 광주교대 부속 초등학교 지인으로부터 “그만 놀아야 하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고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직장 잡기가 어려운 당시, 교직 생활은 나름 넉넉했지요. 생활이 피고 나니 화실을 차릴 여유도 생기더군요. 그때 그렸던 작품들을 모아서 광주도청 앞 예술회관 전시장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40여점이 싹 팔린겁니다. 알고 보니 학부형들이 다 사갔더라고요. 과분한 호응이었지요.”

이 전시는 정 화백의 좌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3년내내 아내를 설득했고 ‘윤허’를 받아냈다. 1971년 첫 교편을 잡은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계속해 온 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4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전업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꿈을 찾고 나니 현실의 팍팍함이 또 다시 숨통을 죄기 시작했다.

“한 5~6년 화실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렸어요. 당연히 수입도 없었지요. 처자식을 어떻게 먹여살리나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그러던 중에 첫번째 인연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정 화백을 깜깜한 화실에서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길을 터 준 것은 1995년 태권도 박사 고(故) 이기정 옹과의 만남이었다. 미국의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이면서 클린턴 전 대통령의 ‘사부’로도 유명한 이기정 옹이 생전에 광주 친구집에서 정 화백의 그림을 보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향토적인 정서 가득 밴 그의 수채화에 감동 받은 이기정 옹이 올랜도에서 열리는 태권도 대회에서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고 싶다며 그의 그림을 사갔다. 이는 정 화백이 미국 화단에 알려지게 된 첫번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국 비영리 여성교육기관 ‘르네상스파운데이션’의 설립자이자 여권신장 운동가인 나이나 메이 여사가 그의 그림을 알아본 것이다.

“메이 여사가 나를 미국 갤러리미셸에 초대해줬죠. 그런데 그 분의 남편이 워싱턴 정계의 거물이었어요. 전시회를 열었는데 미국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찾아와 그림을 사가더군요. 이후로 갤러리미셸의 전속 작가가 됐습니다. 올랜도 주립박물관에 그림도 걸게 됐고요.”

미국에서 먼저 뜨고 나자 한국 화단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광주 지역 언론에서부터 그의 전시가 ‘대서특필’됐다. 그리고 화가 정우범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됐다.

작가는 지금도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불가리아, 스페인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야생화 풍광을 찾아다니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사진 제공=선갤러리]

▶문화예술계의 대부 이강재 금호문화재단 부이사장, 그리고 1세대 갤러리스트 김창실 선화랑 전 회장과의 만남=두번째 인연은 1997년 금호문화재단의 고 이강재 부이사장과였다. 당시 호남 지역 예술가들 대부분이 그의 후원을 받았을 정도로 문화예술계의 대부로 알려진 인사다.

“금호문화재단 근처에 작업실을 냈었죠. 인근 식당에서 홀로 점심을 먹곤 했는데 월간 ‘금호문화’ 책자를 내는 편집장이 나를 알아보고 이강재 부이사장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함께 대낮부터 술을 먹고는 제 화실로 초대했죠. 그 분이 제 그림 3점을 십원도 깎지 않은 가격에 사시고는 금호문화 잡지 표지에 낼 그림 한 점을 부탁하시더군요.”

정 화백은 8호짜리 운주사 돌부처 그림을 그에게 전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고 흡족해 한 이 부이사장은 1년치 표지 그림을 전부 그에게 맡기게 된다.

“한달에 1점씩 80만원이라는 돈을 받게 됐어요. 1990년대 당시로써는 적지 않은 돈이었어요. 그러자 그 지역 예술가들의 시기어린 시선이 쏟아지더군요. 부이사장 눈에 들려고 일부러 금호문화재단 근처에 작업실을 낸 거 아니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번째 인연이 그를 찾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창실(1935~2011) 전 선화랑 회장이었다. 1977년 인사동에 선화랑을 설립한 김 전 회장은 한국 화단의 1세대 갤러리스트이자 컬렉터이면서 ‘인사동의 터줏대감’이었다. 1984년 상업화랑으로는 처음으로 신진 작가들을 지원하는 ‘선 미술상’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화랑협회장을 두번 역임하고 2009년에는 한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주 화실로 직접 찾아온 김 전 회장은 그의 작품 30여점을 모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향토작가 정우범은 ‘전국구 스타 화가’라는 날개를 달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 화백에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최고의 인연은 결국 아내였다. 같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만난 아내는 남편이 꿈을 좇아 생업을 포기하겠다는 결정을 한 이후로 남편 대신 생계를 줄곧 책임져왔다.

“지금도 은행만 가면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심지어 저는 통장에 돈이 얼마 들어 있는지도 몰라요.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도, 아이들을 키워낸 것도 모두 아내였습니다.”

▶유화만이 최고라고 평가받는 한국 화단에서 40년 수채화 ‘한우물’=40년 동안 수채화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정 화백은 그만의 화법으로 한국 수채화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버지가 산골 동네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어요. 제 어린 시절엔 한지와 묵이 지천에 있었던거죠. 그때무터 물과 종이에 대한 감각을 일찍부터 습득한 것 같습니다.”

작가는 화법은 독특하다. 프랑스산 고급 수채화용 종이인 아르슈지에 물을 적신 뒤 유화 붓을 짧게 잘라 만든 붓 끝에 안료를 발라 종이에 두드리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놓고 시간이 지나면 물감이 자연스럽게 번진다. 물과 물감과 종이가 서로의 영역을 침투하고 침투당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색채끼리 저절로 만나 어우러지면서 마치 꿈 속 장면인듯 아련하면서도 오묘한 아름다움을 품은 화폭이 탄생하게 된다.

그의 그림은 서양화로 통칭되는 유화가 최고로 평가받으며 수채화가 ‘외면’당하는 한국 화단에서 유화보다 더 묵직하고 중후한 수채화로 동양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정 화백은 수채화가 저평가된 현실에 대해 한국 미술계가 그림을 보는 수준이 여전히 낮은 게 아니겠냐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미국의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앤드류 와이어스(Andrew Wyethㆍ1917~2009)도 수채화가였습니다. 또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 중 한명인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ㆍ1775~1851)는 수채화가 너무 어려워서 유화를 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죠. 그만큼 수채화는 유화보다도 어쩌면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겁니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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