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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금(오일)’ 분쟁사
뉴스종합| 2014-11-28 11:38
[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석유수출국기구(OPEC)은 27일 오스트리아 빈 총회에서 감산 유지를 확정했지만 OPEC 회원국 간의 파열음을 내면서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7일(현지시간) 시장조사기관 IHS의 부샨 바리 OPEC 애널리스트를 인용해 “OPEC이 1980년대 초 이후 최대 위협을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이번 결정이 “OPEC의 가격 결정력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지금까지 OPEC이 강력한 가격 지배력을 보여왔지만 “베네수엘라 등 일부 회원국이 ‘역(逆) 오일쇼크’에 직면했다”며 “국제 유가 불안정성이 장기화할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OPEC 태동 배경은?=21세기 OPEC의 시대는 저물고 있지만 세계대전 이후 OPEC은 ‘자원 민족주의’를 앞세워 석유시장 패권국으로 군림해왔다.

OPEC의 시장지배 역사는 1, 2차 중동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OPEC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의 석유 메이저인 ‘국제석유자본’이 국제 유가를 결정하는 ‘구매력 중심 시장’에 반발해 1960년 출범했다. 12개 회원국을 두고 세계 원유 공급의 3분의 1을 담당하고 있는 OPEC은 1970년대 1차 오일전쟁(가격인상)과 1980~90년대 2차 오일전쟁(가격인하)을 일으키며 세계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차 오일전쟁=1차 오일전쟁은(1973~1981)은 1970년대 1, 2차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1981년까지 진행된 석유 정치 무기화 전쟁을 말한다.

1차 전쟁은 이른바 1차 오일쇼크를 몰고 온 1973년 이스라엘-아랍국간 4차 중동전쟁과 함께 촉발됐다. 아랍 산유국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감산을 통한 원유가격 인상을 선언하고 미국에 석유수출을 전격 금지시켰다. 이 여파로 1973년초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1년 만에 12달러로 무려 4배 가까이 올랐다.

이후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도화선이 된 2차 오일쇼크는 유가 인상에 기름을 부었다. 이란의 유전 노동자가 팔레비 왕정 타도를 외치면서 파업에 돌입한 것을 계기로 이란이 석유 수출정지를 선언하면서 유가는 배럴당 30달러 시대를 열었다.

이 외에도 중동 산유국은 1차 석유전쟁을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이 가지고 있는 석유 가격 결정권을 완벽하게 뺏어오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1930년 전후 세계 석유자원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계의 주요 7개 석유회사인 이른바 ‘세븐 시스터즈’가 좌지우지했다. 이들 서방 석유 메이저는 카르텔을 맺어 세계 석유가격을 결정하고 막대한 이윤을 창출했다.

1959년 세븐 시스터즈는 산유국의 동의없이 원유가격 인하를 발표해 아랍 산유국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산유국아랍연맹(OAPEC)은 아랍 석유회의를 개최하고 7개사가 유가를 개정할 경우 사전에 통보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60년 석유 메이저들은 다시 가격을 인하했다. 이에 반발한 중동 산유국은 이라크가 중심이 돼 바그다드에서 OPEC을 설립하고 석유 가격 결정권을 가져오게 됐다.

▶2차 오일전쟁=1차 오일전쟁 이후 국제 유가는 또 한번 큰 변동을 맞았다. 1981년부터 1998년까지 기록적인 저유가 시대를 맞은 것이다.

1, 2차 오일 쇼크에 놀란 선진국들이 석유 비축을 확대하고 대체 에너지 개발에 주력한데다 영국의 북해 유전 개발과 멕시코 등 OPEC 비회원국이 산유량을 증대해 석유공급이 과잉되면서 유가가 곤두박질쳤다.

사우디 등 산유국은 감산으로 유가 상승을 도모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한때 40달러를 구가했던 유가는 1986년 1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이 와중에 1985년 영국의 원유가격 자유화 선언은 유가하락에 불을 당겼다. 석유가격 결정권이 서방에서 OPEC으로 넘어간 것을 못마땅한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는 원유 가격 자유화를 선언하면서 OPEC의 맏형 사우디를 정조준했다.

사우디는 가격전쟁으로 응수했다. 1986년 산유량을 200만배럴에서 1000만배럴로 극적으로 늘리면서 저유가 기조는 1998년까지 고착화됐다. 이것이 ‘유가인하’ 2차 석유전쟁(1986~1998)이다.

그러나 1990년대 저유가는 미국의 시나리오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소련 봉쇄정책을 폈던 미국이 석유수출 수입에 의존했던 소련의 계획경제에 타격을 주기 위해 사우디와 합작해 저유가 시대를 지속시켰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저유가는 소련 붕괴의 도화선이 됐다.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3차 석유전쟁을 ‘펌프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미국과 사우디가 30년 전 소련에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2, 3차 석유대전의 닮은꼴을 지적하기도 했다.

/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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